티베트 지역의 분리독립운동
독립운동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는 곳 하나는 티베트입니다. 티베트이지요. 티베트는 위구르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신장에 아래쪽에 위치한 또 변경 지역에 위치해있어요. 특히나 히말라야 산맥에 티베트가 있고 그 밑에 지나가고 있는, 그래서 굉장히 고도가 높은 지역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해발 4~5,000미터 정도에 있는 티베트 고원 일대 있는 지역이죠. 티베트입니다. 여기는 티베트족들이 90%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티베트어를 사용하는 그런 지역입니다. 그래서 티베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고 그리고 자신들이 한동안 독립적으로 중국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살아온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왜 우리가 갑자기 중국의 영역이 되었지 하는 지역이 티베트이에요.
티베트 지역의 역사
이들의 역사를 보시면요, 한 7세기까지는 티베트 지역 고원을 중심으로 해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영향력을 가졌던 꽤 힘이 있었던 왕국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이 왕국에 여긴 이제 불교 중심이거든요. 불교 중심인 이런 왕국인데 이 불교 세력 간의 파벌 싸움이 벌어져요. 파벌 싸움이 벌어지면서 굉장히 힘이 있었던 국가가 이제 쪼개지기 시작을 하는 거죠. 그래서 티베트 왕국이 소왕국으로 분열이 되게 되고요. 그때 당시에 발응 했었던 몽골족들이, 몽골족들이 막 말을 타고 중앙아시아를 달려서 여기저기 다 침략을 하고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가잖아요. 그때 몽골이 들어와서 티베트까지 점령을 하게 됩니다. 몽골이 티베트를 점령했으나 자신들이 여기를 다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티베트 쪽에 종교지도자를 내세워서 여기를 관리하기 시작을 해요. 이제 그러다 보니 티베트는 어차피 우리를 지배하는 우리에 지도자는 누구냐면 티베트의 종교지도자예요. 그렇기 때문에 크게 문제를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종교 지배자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뭐 그렇게 크게 몽골족들을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상황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 이후에 청나라는 여기를 티베트를 자신들의 자국의 영토라고 인식은 하고 있으나 티베트랑 그냥 우호적인 관계를 취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침략을 해서 여기는 우리 땅이니까 우리식으로 살아 이런 접근은 하지 않아요. 그대로 둡니다. 그러던 중에 1904년이 되면 영국이 라싸를, 라싸가 수도입니다. 티베트의 수도인데. 이 티베트의 수도를 침공을 해요. 바로 밑으로 내려가면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인도가 있잖아요. 거기 있었던 인도군이 여기까지 올라오게 된 거죠. 그러자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서 대항했지만 영국군한테 패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이 이거는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돼요. 그러고 나서 영국과 중국 사이에 영토 협정을 맺으면서 중국 영유권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티베트는 영국한테 졌는데 나중에 봤더니 중국 땅이 되어있는 상황이 돼요. 그러고 나서 신해혁명이 중국에서 발생하게 돼요. 신해혁명이 발생하게 되면서 청나라가 힘을 잃게 되고 공산당이 이제 집권을 하게 되는 이 과정에서 굉장히 불안한 시기가 지속이 되자. 티베트는 앗 여기는 우리는 그냥 자치를 해야지.라고 하면서 달라이 라마가 알아서 통치를 하는, 직접 통치를 하는 이런 상황이 한 20여 년간 지속이 되게 됩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는 중국으로 넘어갔던 것 같긴 하지만 우리가 달라이 라마가 계속해서 지배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티베트 사람들은 별로 동요 없이 살고 있었는데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이 된단 말이에요.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가가 이제 성립이 되었어요. 국가가 성립이 되고 나서 자신들의 경계를 확정을 해야 되는데 여기는 티베트를 가만히 봤더니 여기는 우리 땅이란 말이죠. 영국하고 협정을 맺었어요. 본인들 땅이에요. 그래서 공산당이 여기로 들어오게 됩니다. 티베트로 들어오게 돼서 중국 본토 하고 가까운, 중국 베이 지겹고 가까운 동부지역부터 강제 점령을 하기 시작을 해요. 이제 중국군이 들어왔어요. 인민해방군이 들어옵니다. 자, 여기에 대해서 티베트는 여기는 우리 땅인데 하면서 UN에 제소를 했으나 UN에서는 별다른 액션을 취해주지 않습니다. 티베트는 그냥 그대로 남은 거예요. 그리고 베이징에서 그러면은 중국 정부에서 너네는 티베트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지 우리 논의를 해보자.라고 하면서 달라이 라마를 불러옵니다. 베이징으로. 베이징으로 불러서 가서 협의를 하러 갔으나 가서 봤더니 어떻게 했냐면 중국 정부에서는 여기는 우리 땅이야, 중국 땅에 편입시켜 버릴 거야.라고 통보를 해주게 되는 거죠. 그러고 나서는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에 들어오게 돼요. 라싸까지 들어옵니다. 그때 당시에 얘기는 뭐냐면은 불온한 종교로부터 너희들을 해방시켜 주겠어.라는 그런 타이틀을 달고 인민해방군이 라싸에 진입을 해요. 그러면서 종교적인 건물, 종교적인 집회 이런 것들을 다 파괴하고 막아버리는, 티베트 사람들이 보기엔 이들은 불교를 중심으로 우리가 흔히 라마교라고 부르는 이 불교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인데 갑자기 사원이 없어지고요. 우리가 모여서 집회를 할 수도 있는, 모여서 가볍게 기도를 할 수도 있는 이런 기회도 다 차단을 시켜버리는 기존의 문화를 다 말살시켜버리는 행위를 하게 되는 거죠.
티베트인들의 중국에 대한 반감
티베트인들이 중국군, 중국에 대해서 굉장히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이 티베트인들이 중국에 대해서 가장 크게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라고 하는 게 1959년 3월 10일에 벌어지게 되는데요, 3월 10일은 티베트 사람들에게 민족 봉기일 정도로 인식이 되는 굉장히 중요한 날 중에 하나입니다. 이때 독립 쟁취를 위해서 굉장히 열심히 시위를 했다고 해요. 그때 그 이유가 뭐였냐면요, 중국군에서 달라이 라마를 초청을 합니다. 공연을 보러 오세요.라고 달라이 라마를 초청을 하는데 대신 이런저런 조건을 달아요. 공연을 보러 올 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고 와주세요. 그중에 마지막에 나온 조건이 뭐였냐면 이 달라이 라마의 경비를 하나도 붙이지 말고 경비나, 군인을 하나도 붙이지 말고 그냥 나오세요. 무방비상태로 나오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달라이 라마가 살고 있던 포탈라 궁전에 우리는 달라이 라마를 지켜야 돼.라고 하면서 티베트인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음모론도 사실은 있어요. 이 시절에 1959년에 사람, 티베트인들이 어떻게 저런 조건을 알고 저기에 봉기를 하러, 저기에 데모를 하러 모였겠느냐 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군이 일부로 소문을 퍼트렸다.라는 얘기도 있기는 하는데요. 티베트인들이 포탈라 궁전을 에워싸고 라마를 지키러 갑니다. 달라이 라마를 지키러 가구요. 이들이 거기에서 중국에 대해 크게 시위를 하게 되는 거죠. 그 사이에 달라이 라마는 인도 북부에 있는 다람살라 지역으로 피신을 가게 돼요. 달라이 라마는 현재도 인도에 계시고요. 거기서 망명정부를 수립해서 달라이 라마는 외교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그래서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을 해야 되겠다.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백악관에도 갔고요. 여러 국가의 정상들을 만나면서 티베트의 현재 중국이 들어와 있음이 굉장히 부당하다.라는 것을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사실은 반대하는 티베트인들도 있기는 해요. 우리가 이런 식으로 외교적 접근만 해서는 우리는 독립을 못할 거야라고 해서 우리도 위구르족처럼 저렇게 테러도 하고 이런 접근을 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입장도 있기는 하나 현재까지는 비폭력적인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있는 곳이 티베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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