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하고 중국 간에 국교가 수립된 이후 한참 동안은 센카쿠를 놓고 중국과 일본 간의 갈등은 봉합이 되고 잠잠해집니다. 그러다가 1992년 2월에 중국은 제7차 전국인민자 대표자 회의를 엽니다. 그러면서 그 회의에서 등소평 씨가 말했던 그 조금 이 얘기를 영유권 논의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자 그 얘기를 다시 꺼냅니다. 그러면서 그 회의에서 다오위다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합니다. 그러고 좀 있다가 1996년 2월 중국은 다오위다오 인근에 대한 대대적인 유전 탐사작업을 실시합니다. 당연히 여기에 대해서 일본 정부와 일본의 극우 단체는 반발하고 그리고 일본의 극우단체는 센카쿠가 자국의 영토라고 하는 것을 대 내외 과시하기 위해서 센카쿠에다가 등대를 설치하고 희생자 위령비를 세우고 이렇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또 중국과 일본은 첨예하게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997년 7월에 홍콩이 영국에서부터 이제 중국으로 반환이 됩니다. 그러면서 중국이 내건 모토 중에 하나가 하나의 차이나, 원 차이나, 하나의 중국을 강조를 하고요 하나의 중국이라는 관점에서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과 논란이 되고 있는 다오위다오, 그다음에 남중국해에 있는 난사군도 이런 섬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재차 천명합니다.
방공식별구역 선포
그 후에 2010년에는 중국어선이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센카쿠에 들어가게 되고 그 들어간 배가 일본 해상보안청에 나포되고 그러면서 선장이 구속되는 이런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러다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센카쿠에 들어온 선장 해프닝은 17일 만에 끝난다고 했잖아요. 그러고 좀 있다가 일본은 전격적으로 센카쿠의 국유화를 선언합니다. 그때가 2012년입니다. 당연히 일본이 센카쿠의 국유화, 이것은 일본의 땅이라고 하니까 중국은 무슨소리냐고 거세가 반발합니다. 그러고 중국은 다음 해 2013년에 센카쿠, 자기들 말로는 다오위다오, 센카쿠를 포함한 동중국해 일원해를 자기들의 방공식별구역으로 포함을 시킵니다. 방공식별구역으로 포함시켰다는 이야기는 뭔 말이냐 하면 그 하늘은 중국 하늘이라 하는 메시지를 일본에게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중국 군함이 아주 보란 듯이 다오위다오 인근을 순찰하고요, 그리고 중국의 잠수함이 그곳을 가고 그러면서 중국과 일본 간에 영토 갈등이 더 첨 해집니다. 이 센카쿠, 중국말로 다오위다오를 놓고 일본과 중국이 벌리는 이 영토전쟁은 사실 순수한 영토전쟁, 영토 수호 차원 이런 게 아니라 센카쿠 주변 해변에 매장되어있는, 분포되어있는 해저자원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도 맞물려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이 센카쿠 주변의 해역에는 조그마한 대륙붕, 뱅크라고 하는 대륙붕이 잘 발달돼있어서 아주 어족이 풍부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해 역에는 석유가 대량으로 매장되어있습니다. 실제로 대만이 미국계 회사에게 의뢰해서 1969년에 탐사작업을 해본 결과 센카쿠 인근 해변에는 100억 ~ 1000억 배럴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상당한 양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그 자원이 탐났고 지금 현재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일본은 그 자원 때문에 센카쿠를 영토 지역화, 중국으로 내줄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센카쿠 지역의 중요성
센카쿠는 대단히 국제정치학적,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현장입니다. 무슨얘기냐면 중국이 태평양으로 나오려면 동중국해를 거쳐야 합니다. 그 동중국해라고 하는 곳이 대만과 오키나와 아래쪽에 있는 그 해역을 동중국해입니다. 이 동중국해에 대한 해역을 차지하고 그리고 태평양으로 나와야 됩니다. 그 태평양으로 나오려고 하면 아주 중요한 거점 중에 하나가 센카쿠입니다. 센카쿠가 일본 땅이냐 중국 땅이냐에 따라서 중국어선이 태평양으로 나가는 게 쉽냐. 쉽지 않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대만뿐만 아니라 대만과 오키나와 사이에 있는 다오위다오 영유권을 필히 주장을 해야 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다오위다오를, 자기들 말로 센카쿠를 절대로 중국에 내 보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다오위다오, 센카쿠가 중국 영토가 되는 순간 중국은 마음대로 태평양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홋카이도 위쪽,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베이스로 해서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에 극동함대, 또 동중국해에서 호시탐탐 태평양으로 나오려고 하는 중국 함대. 이 두 해상세력 때문에 자국에 영유권 관리가 쉽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일본은 센카쿠를 중국에게 절대로 활약할 수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섬나라라고 하는 지중학적 위치가 또 어떤 해양 군사적인 측면에서 센카쿠를 중국에게 내줄 수 없는 그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이 오키나와 아래쪽 대만 인근에 위치한 센카쿠를 놓고, 왜 중국과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고 그리고 현재 러시아가 시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홋카이도 위쪽에 있는 네 개섬, 일본 사람들은 이 네 개 섬을 국방 영토라고 하는데요. 이 네 개섬을 러시아로부터 돌려달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속사정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꽤 오래됐습니다. 2010년 9월 7일 일본 해양보안청이 센가쿠 인근해에서 조업을 하고 있던 불법 조업이었죠. 중국 어선을 나포하고 선장을 구속합니다. 중국이 거칠게 항의하지만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선장을 풀어주지 않으면, 선박을 돌려주지 않으면 일본에 수출하는 희토류를 전면 수출 금지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일본은 중국에 위협에 백기를 들고 선장을 석방합니다. 17일간 벌여졌던 영토분쟁은, 영토 갈등은 중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본은 현재 센카쿠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국방 네 개의 도서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같은 해 2010년 10월 1일 러시아의 대통령 메드베데프가 쿠릴열도를 방문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대통령이 쿠릴열도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성명을 발표합니다. 왜 우리 영토에 대통령이 오느냐. 비판적인 성명을 내놓습니다. 그러자 러시아는 이렇게 대응합니다. 아니, 러시아 대통령이 자국에 영토에 가는 게 무엇이 문제냐. 부디 일본은 냉정을 잃지 말라. 이렇게 따끔하게 점잖게 훈계를 합니다. 일본이 자기들 땅이니 돌려달라 하는 북방 네 개섬은 여전히 러시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두 사건은 아주 대단히 역설적입니다.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센카쿠 열도에 대해서는 중국이 돌려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홋카이도 바로 옆에 있는 네 개 섬을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는데 일본이 돌려달라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왜 중국과 러시아하고 영토 갈등을 빚고 있을까요? 일본에 욕심이 많았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벌어진 2차 세계대전에 후유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청일전쟁의 전리품이었던 센카쿠 제도,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리품으로 돌아간 러시아로 돌아간 북방 네 개섬, 아이러니합니다. 특히 일본은 홋카이도 인근에 위치해 있는 네 개 섬, 이곳은 참치 어장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이 영토를 달라고, 줄기차게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와 영토 갈등을 빚고 있는 그 배경에는 어떤 역사적인 사연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센카쿠와 댜오위다오로 각각 다르게 불리는 곳
지금 오키나와에서 서남쪽으로 거의 대만 인근에 다섯 개의 무인도와 세 개의 암초로 이루어져 있는 군도 섬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본말로는 센카쿠 제도라고 하고 중국말로는 다오위다오라고 얘기하고 우리 한자식 표현으로는 조어도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독도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가장 큰 섬의 면적이 6.3km^2입니다. 오키나와로부터는 대략 약 400km 떨어져 있고요. 타이완의 지롱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175KM 떨어져 있습니다. 일본보다는 타이완과 가까운 섬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그 섬들은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역사적 기록을 제시하면서 다우 위 다오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을 합니다. 실제로 16세기 초에 류큐왕국, 오키나와 제도를 당시는 류큐왕국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류큐왕국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에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서 출발해서 8개의 바위섬을 지나서 류큐로 간다 하는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근거로 해서 류큐는 일본 영토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왕국이었다고 중국은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1893년 청나라 서태후가 칙서를 내려서 다오위다오가 자국민에 땅이고 자국민에게 자기가 하사했다고 하는 그런 기록을 제시합니다. 이 시점이 센카쿠를 일본령으로 편입한 거보다 보다 더 앞선다. 따라서 다오위다오, 일본 말로는 센카쿠죠 중국말로 다오위다오 이곳은 자기들의 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따라서 다오위다오를 포함한 타이완과 그 부속도서 모두기 일본으로 할양됩니다. 청일 전쟁에서 만들어진 전리품이 일본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리품으로 일본에서 돌아간 것뿐이지 그 땅은 기본적으로 중국에 땅이다.라고 하는 게 중국의 입장입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체결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타이완에 대한 일본에 권한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이제 타이완과 그 부속도서, 즉 센카쿠는 중국말로 다오위다오에 영유권은 당연히 타이완과 중국으로 돌아와야 된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일본의 주장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고 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지고 나서 일본이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땅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일본이 점령했던 땅에 분할 획정에 대한 협정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입니다. 1951년 9월 8일 날 미국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돼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고 합니다. 과거 일본이 지배했었던 식민지와 점령지에 대한 일본의 주권을 이제 정리한, 그런 조약입니다. 우리나라 영토 협정도 이 조약에서 명시가 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주장은 약간 다릅니다. 아마 여러분들 혹시 추후에 제가 아래쪽에 있는 일본에 가고시마를 여행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가고시마에 가면은 모든 관광객들이 꼭 가보는 유명한 관광명서 센간엔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센간엔은 지금의 가고시마 현하고 그 옆에 있는 미야자키 현을 포함해서 규슈의 남서부 일대를 지배한 사쓰마 번주였던 시마즈 가문이 사꾸라지마와 긴 코만을 조망하기 아주 좋은 곳에 만들어 논 17세기 형 일본식 정원이 바로 센간엔입니다. 그런데 이 정원을 만든 시마즈 가문은 류큐왕국 정복과 우리 임진왜란 하고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한 만여 명의 병력을 지원합니다. 특히 이 시마쓰 가문은 우리 남해안 일대, 전라남도에 순천성, 순천에 가면 순천 성이 있고요. 경상남도 사천에 가면 쓰촨 성이 있습니다. 이 순천 성과 쓰촨 성에 참가한 주력 군대가 이 시마즈 군이었습니다. 근데 이 시마즈 군이 임진왜란 후 그러니까 1609년 류큐왕국을 정벌합니다. 그런데 이 시마즈 가문이 시도한 류큐왕국의 정벌은 아주 손쉽게 끝납니다. 그리고 이제 류큐왕국은 시마즈 가문의 영향권 내로 들어갑니다. 당시 류큐왕국은 중국의 조공을 바치는 이른바 조공국이었지만 시마즈 가문이 정벌하면서 이 류큐왕국은 중국에도 조공을 바치고 시마즈 가문에도 조 궁을 바치고 그리고 도카가 와 막부에에도 조공을 바치는 3중 조공국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1879년 일본은 류큐왕국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을 하게 됩니다. 사실상 시마즈 가문이 류큐왕국을 침공한 이후에 형성된 일본 본토와 류큐왕국과의 조공관계가 이제 공식적으로 군신 간에 국가 간의 관계로 형성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일본 주장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센카쿠 열도, 중국말로 얘기하면 다오위다오 이것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일본이 가져온 것이 아니라 류큐왕국 정복 이후 일본 땅이 되었다.라고 얘기를 한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청일전쟁의 전리품이 아닌 일본 류큐왕국의 부속 도서였고 그 부속도서를 일본이 영토화 했다고 하는 겁니다. 실제로 일본은 1872년에 류큐왕국을 폐지하고 류 큐번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1879년에는 류큐왕국을 지금의 오키나와 현으로 편입시키고요 그 편입시킬 때 류큐왕국과 그 부속도서 이것을 다 일일이 확인을 해가지고 오키나와 현으로 편입됐고 오키나와 현은 일본의 영토가 됐기 때문에 센카쿠의 일본 영토로의 귀속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런 논리를 폅니다. 또한 일본 내무성은 이러한 글이 또 논리를 주장합니다. 일본 내무성에 있는 지리 국, 내무성에 부속기관인 지리 국이 1879년에 펴낸 대일 본부 현관 할도라는 지도에 센카쿠가 일본 영토라고 표시되어 있으니 자국 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895년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그 이전에 이미 류큐왕국과 그 부속도서가 일본의 영토가 됐다는 논립니다. 물론 이제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일본은 센카쿠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실효적으로 지배를 할 때 타이완이나, 중국이 거기서 반대를 하지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반대를 하느냐, 따라서 센카쿠는 자국 영토라고 하는 주장을 펼칩니다. 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타이완과 그 부속도서였던 센카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것과 역사적으로 류큐왕국의 부속도서였던 센카쿠를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이 차지했던 땅, 이것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이것은 동의한다. 그렇지만 류큐왕국의 부속도서였던 센카쿠는 원래 주인이 중국이 아니고 일본이었다. 그런 논리로 센카쿠의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반별 하고 있습니다. 만만치 않은 논립니다. 그러다가 이 센카쿠, 중국말로 다우 위 다오를 둘러싼 영토 갈등은 1970년을 전후에서 본격적으로 등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에 석유가 많이 매장되어있다.라고 하는 석유탐사 결과가 발표되기 때문입니다. 1969년 7월에 당시 타이완은 다오위다오를 포함한 주변 해역에 대한 석유탐사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석유탐사를 하면서 다오위다오는 타이완의 영토라고 하는 사실을 타이완 주재 일본 대사관에 전달을 했다고 합니다. 이건 중국 논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1972년 2월에 그 다오위다오를 타이완의 영토로 편입했고 법률도 제정을 했다. 하는 게 타이완의 논립니다. 여기에 덧 붙여서 중국은 타이완을 포함한 원차이나를 강조하기 때문에 타이완의 영토는 곧 메인 차이나, 중국의 영토다 따라서 센카쿠는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논란이 계속되는 상황에 또 하나의 논란을 제기할 수 있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오키나와 반환 협정
1971년에 미국이 점령하고 있었던 오키나와 반환 협정이 체결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은 오키나와와 그 부속도서를 차지합니다. 일본의 영토이지만 그 오키나와 부속도서에 대한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미국이 갖는 일명 시정권을 미국이 갖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 5월부터 이 시정권을 이제 미국이 아닌 일본에게 되돌려 줍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오키나와와 그 부속도서, 일본이 얘기하는 오키나와 그 부속도서, 그 부속도서 중의 하나가 뭐냐면은 지금 문제가 되는 센카쿠입니다. 이 센카쿠는 미국이 그동안에 관할했었습니다. 그 관할권이 이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죠. 일본으로 넘어가니까 일본은 자연스럽게 센카쿠를 포함한 그 주변 해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주권을 행사하는 영토로 규정을 하게 됩니다.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된 후에 중국은 가만히 보니까 이게 걱정입니다. 왜냐하면 저러다가 어영부영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했던 다오위다오가 일본 땅으로 그냥 편입돼버릴 거 같거든요. 그래서 중국은 일본에게 다오위다오에 대한 정식 반환 요청을 청구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일본에게 오키나와를 넘겨주는 오키나와 반환 협정 그 의사록에는 센카쿠 열도에 대한 시정권 명시가 되어있고 그 시정권도 일본에게 넘어왔다. 미국이 인정해줬는데 어떻게 중국 당신들이 달라고 하느냐. 그런 논리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1978년 8월입니다. 일본하고 중국이 평화 우호조약, 국교를 수립하는 평화 우호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중국의 심리학자 등소 평이가 일본을 방문합니다. 일본을 방문하면서 이 일본이 실효적 지배하고 있는 센카쿠, 중국의 다오위다오네 대한 논쟁거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 등소평 지도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하지 말자. 지금 우리가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국교를 체결을 하는 마당에 좀 국교 체결과 좀 동 떨어진 이야기를 왜 하냐. 그런 얘기는 우리보다도 훨씬 뛰어난 다음 세대가 정말 지혜가 있는 다음 세대가 양국이 다 동의할 수 있는 그런 해결방안을 찾을 거 아니냐. 그럴 때까지 센카쿠의 영유권은 그냥 놔두자. 그렇게 해서 이제 센카쿠 영유권 분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됩니다.
독립운동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는 곳 하나는 티베트입니다. 티베트이지요. 티베트는 위구르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신장에 아래쪽에 위치한 또 변경 지역에 위치해있어요. 특히나 히말라야 산맥에 티베트가 있고 그 밑에 지나가고 있는, 그래서 굉장히 고도가 높은 지역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해발 4~5,000미터 정도에 있는 티베트 고원 일대 있는 지역이죠. 티베트입니다. 여기는 티베트족들이 90%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티베트어를 사용하는 그런 지역입니다. 그래서 티베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고 그리고 자신들이 한동안 독립적으로 중국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살아온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왜 우리가 갑자기 중국의 영역이 되었지 하는 지역이 티베트이에요.
티베트 지역의 역사
이들의 역사를 보시면요, 한 7세기까지는 티베트 지역 고원을 중심으로 해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영향력을 가졌던 꽤 힘이 있었던 왕국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이 왕국에 여긴 이제 불교 중심이거든요. 불교 중심인 이런 왕국인데 이 불교 세력 간의 파벌 싸움이 벌어져요. 파벌 싸움이 벌어지면서 굉장히 힘이 있었던 국가가 이제 쪼개지기 시작을 하는 거죠. 그래서 티베트 왕국이 소왕국으로 분열이 되게 되고요. 그때 당시에 발응 했었던 몽골족들이, 몽골족들이 막 말을 타고 중앙아시아를 달려서 여기저기 다 침략을 하고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가잖아요. 그때 몽골이 들어와서 티베트까지 점령을 하게 됩니다. 몽골이 티베트를 점령했으나 자신들이 여기를 다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티베트 쪽에 종교지도자를 내세워서 여기를 관리하기 시작을 해요. 이제 그러다 보니 티베트는 어차피 우리를 지배하는 우리에 지도자는 누구냐면 티베트의 종교지도자예요. 그렇기 때문에 크게 문제를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종교 지배자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뭐 그렇게 크게 몽골족들을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상황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 이후에 청나라는 여기를 티베트를 자신들의 자국의 영토라고 인식은 하고 있으나 티베트랑 그냥 우호적인 관계를 취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침략을 해서 여기는 우리 땅이니까 우리식으로 살아 이런 접근은 하지 않아요. 그대로 둡니다. 그러던 중에 1904년이 되면 영국이 라싸를, 라싸가 수도입니다. 티베트의 수도인데. 이 티베트의 수도를 침공을 해요. 바로 밑으로 내려가면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인도가 있잖아요. 거기 있었던 인도군이 여기까지 올라오게 된 거죠. 그러자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서 대항했지만 영국군한테 패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이 이거는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돼요. 그러고 나서 영국과 중국 사이에 영토 협정을 맺으면서 중국 영유권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티베트는 영국한테 졌는데 나중에 봤더니 중국 땅이 되어있는 상황이 돼요. 그러고 나서 신해혁명이 중국에서 발생하게 돼요. 신해혁명이 발생하게 되면서 청나라가 힘을 잃게 되고 공산당이 이제 집권을 하게 되는 이 과정에서 굉장히 불안한 시기가 지속이 되자. 티베트는 앗 여기는 우리는 그냥 자치를 해야지.라고 하면서 달라이 라마가 알아서 통치를 하는, 직접 통치를 하는 이런 상황이 한 20여 년간 지속이 되게 됩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는 중국으로 넘어갔던 것 같긴 하지만 우리가 달라이 라마가 계속해서 지배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티베트 사람들은 별로 동요 없이 살고 있었는데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이 된단 말이에요.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가가 이제 성립이 되었어요. 국가가 성립이 되고 나서 자신들의 경계를 확정을 해야 되는데 여기는 티베트를 가만히 봤더니 여기는 우리 땅이란 말이죠. 영국하고 협정을 맺었어요. 본인들 땅이에요. 그래서 공산당이 여기로 들어오게 됩니다. 티베트로 들어오게 돼서 중국 본토 하고 가까운, 중국 베이 지겹고 가까운 동부지역부터 강제 점령을 하기 시작을 해요. 이제 중국군이 들어왔어요. 인민해방군이 들어옵니다. 자, 여기에 대해서 티베트는 여기는 우리 땅인데 하면서 UN에 제소를 했으나 UN에서는 별다른 액션을 취해주지 않습니다. 티베트는 그냥 그대로 남은 거예요. 그리고 베이징에서 그러면은 중국 정부에서 너네는 티베트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지 우리 논의를 해보자.라고 하면서 달라이 라마를 불러옵니다. 베이징으로. 베이징으로 불러서 가서 협의를 하러 갔으나 가서 봤더니 어떻게 했냐면 중국 정부에서는 여기는 우리 땅이야, 중국 땅에 편입시켜 버릴 거야.라고 통보를 해주게 되는 거죠. 그러고 나서는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에 들어오게 돼요. 라싸까지 들어옵니다. 그때 당시에 얘기는 뭐냐면은 불온한 종교로부터 너희들을 해방시켜 주겠어.라는 그런 타이틀을 달고 인민해방군이 라싸에 진입을 해요. 그러면서 종교적인 건물, 종교적인 집회 이런 것들을 다 파괴하고 막아버리는, 티베트 사람들이 보기엔 이들은 불교를 중심으로 우리가 흔히 라마교라고 부르는 이 불교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인데 갑자기 사원이 없어지고요. 우리가 모여서 집회를 할 수도 있는, 모여서 가볍게 기도를 할 수도 있는 이런 기회도 다 차단을 시켜버리는 기존의 문화를 다 말살시켜버리는 행위를 하게 되는 거죠.
티베트인들의 중국에 대한 반감
티베트인들이 중국군, 중국에 대해서 굉장히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이 티베트인들이 중국에 대해서 가장 크게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라고 하는 게 1959년 3월 10일에 벌어지게 되는데요, 3월 10일은 티베트 사람들에게 민족 봉기일 정도로 인식이 되는 굉장히 중요한 날 중에 하나입니다. 이때 독립 쟁취를 위해서 굉장히 열심히 시위를 했다고 해요. 그때 그 이유가 뭐였냐면요, 중국군에서 달라이 라마를 초청을 합니다. 공연을 보러 오세요.라고 달라이 라마를 초청을 하는데 대신 이런저런 조건을 달아요. 공연을 보러 올 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고 와주세요. 그중에 마지막에 나온 조건이 뭐였냐면 이 달라이 라마의 경비를 하나도 붙이지 말고 경비나, 군인을 하나도 붙이지 말고 그냥 나오세요. 무방비상태로 나오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달라이 라마가 살고 있던 포탈라 궁전에 우리는 달라이 라마를 지켜야 돼.라고 하면서 티베트인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음모론도 사실은 있어요. 이 시절에 1959년에 사람, 티베트인들이 어떻게 저런 조건을 알고 저기에 봉기를 하러, 저기에 데모를 하러 모였겠느냐 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군이 일부로 소문을 퍼트렸다.라는 얘기도 있기는 하는데요. 티베트인들이 포탈라 궁전을 에워싸고 라마를 지키러 갑니다. 달라이 라마를 지키러 가구요. 이들이 거기에서 중국에 대해 크게 시위를 하게 되는 거죠. 그 사이에 달라이 라마는 인도 북부에 있는 다람살라 지역으로 피신을 가게 돼요. 달라이 라마는 현재도 인도에 계시고요. 거기서 망명정부를 수립해서 달라이 라마는 외교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그래서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을 해야 되겠다.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백악관에도 갔고요. 여러 국가의 정상들을 만나면서 티베트의 현재 중국이 들어와 있음이 굉장히 부당하다.라는 것을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사실은 반대하는 티베트인들도 있기는 해요. 우리가 이런 식으로 외교적 접근만 해서는 우리는 독립을 못할 거야라고 해서 우리도 위구르족처럼 저렇게 테러도 하고 이런 접근을 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입장도 있기는 하나 현재까지는 비폭력적인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있는 곳이 티베트입니다.
중국입니다. 중국은 굉장히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그런 국가죠. 땅이 굉장히 넓어요. 굉장히 넓은 땅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런 국가예요. 여러분이 중국에 크기를 생각을 다시 해 보시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럽이라고 불리는 40여 개 이상의 국가가 들어있는 유럽 대륙과 거의 사이즈가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요. 중국이 유럽보다는 약간 작지만은 거의 비슷한 크기에 굉장히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국가인데요. 이렇게 광활한 영토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그렇다 보면 너무나도 넓은 영토에 사람들이 흩어져 있는 사람들, 원래 다른 민족이었을 가능성도 굉장히 크고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더라도 떨어져 살다 보면 서로 특징이 다르게 발현되기 마련이죠. 이러다 보니 우리가 중국이라 부르는 그 큰 국가 안에는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인구센서스라든지 여러 가지 통계조사를 통해서 자신들의 민족을 조사를 했는데요. 그거를 확인을 해보니 공산당에서 얘기를 하기로는 56개의 민족이 중국에 존재한다.라고 발표를 하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56개의 민족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센서스도 업데이트를 하고 있는 중인데요, 실제로 56개인가는 정확하다고 하기는 조금 어렵겠죠. 왜냐면 민족이라는 거 자체가 정의가 쉽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에 하지만 중국에서는 자신의 국가 안에는 56개의 민족이 존재한다.라고 얘기합니다. 56개의 민족이 존재하고 있어요. 근데 요즘은 국가의 단위는 보통 어떻게 얘기가 되냐면은 민족국가단위로 많이 얘기가 되잖아요. 56개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살고 있는 이러한 나라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얻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넓은 영토를 가지고 너무나도 많은 수의 민족을 가지고 있는 그런 국가가 가진 일종의 운명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56개의 민족이 처음부터 분리주의 운동을 하느냐, 그럼 중국이 지금 현재와 같은 공산당 일당 체제를 유지하고 이렇게 살기는 좀 쉽지가 않겠죠. 그래서 56개의 민족 중에서도 분리주의 운동을 추구하는 민족은 소수인데요. 왜 그렇게 됐을까를 간단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중국으로부터 분리를 주장하는 민족이 소수인 이유
여러분이 중국인들을 만나서 너는 어떤 민족이니, 어떤 민족에 속해있니 하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한족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나는 한이야.라고 얘기를 하는데요. 이게 왜 그러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인이 한족으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센서스를 했을 때 2010년 센서스를 기준으로 봤을 때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본인은 한족으로 분류를 합니다. 이거는 기존의 한나라, 명나라의 지배 세력이었던 한족에 대한 동경일 수도 있고요 실제로 본인이 한 족일 수도 있고요. 그리고 한족들과 같이 섞여 가면서 본인을 한족으로 인식하게 되는 이런 영향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90% 이상이 한족이다 보니 나머지 소수민족들은 55개의 소수민족이 8% 조금 넘는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데요. 이 상대적으로 작은 소수민족, 그것도 다시 55개로 쪼개져요. 그러다 보니 이들이 힘을 발휘해서 한족을 물리치고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는 많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다가, 이 소수민족들이 한 곳에 모여 사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요. 그 주변은 한족들이 다 둘러싸고 있어요. 이러다 보니 전반적으로 봤을 때는 이 소수민족들이 아, 우리는 독립해서 중국에서 떨어져 나와야겠어요.라고 하는 그런 운동은 많이 일어나지 않고 있고요. 오히려 한족의 동화되어 사는 민족들도 많은 게 현재의 상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족의 분리주의 운동
우리가 중국이랑 너희들이랑 살기가 좀 어렵구나.라고 주장을 하면서 중국과 떨어져 나와서 분리주의 운동을 하고 있는 지역이 2군데가 있는데요. 하나는 신장입니다. 신장 위구르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신장 지역이고요. 다른 하나는 티베트, 많이 알려져 있죠. 티베트가 오히려 서구사회에서는 굉장히 많이 알려져 있어요. 티베트에서는 저들이 분리주의 운동을 하고 있구나.라는 거를 라마를 통해서 많이 외교적으로 알리기도 하고요. 그리고 저희가 또 티베트 운동 같은 경우에는 서구에서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작품들, 문화작품들을 보시면 심지어는 만화에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심슨 가족이라든지 이런데 보시면 프리티베트이라는 구호를 가지고 리사가 외치기도 하는데요. 티베트는 중국이 아니다고 하는 이런 얘기를 많이 하고 있는 곳, 그래서 저는 두 곳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게요. 위구르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신장지역, 티베트 지역 이 두 군데에서 왜 분리주의 운동이 이 강력한 중국에 같이 융합되어 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살고자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카슈미르 지방에서는 특히 인도령 카슈미르 지방에서는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으로 가야 된다. 파키스탄으로 영도를 귀속시켜야 한다고 하는 그런 크고 작은 반란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격돌할 그런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카슈미르가 아닌 인도의 서쪽 구자라트 주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구자라트 주에 있는 란쿠츠라는 곳에서 양국이 격돌하게 됩니다. 이 일대는 큰 호수가 있습니다. 큰 호수가 있고, 그 호수 옆에는 넓은 소금사막이 있어가지고 1947년 독립할 때도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국경선을 긋는데 아주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국경선을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 그런 과정에 1965년 4월에 국경선 문제로 이곳에서 충돌이 벌어집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전쟁이죠. 이곳에 전쟁이 나니까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잠무 카슈미르 해방 전선이 잘 됐다 싶어 가지고 무슬림 세력들을 규합을 해가지고 인도를 공격합니다. 그러니까 인도는 전선이 두 개가 된 것이죠. 구자라트 주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맞붙고, 또 카슈미르에서 맞붙는 이 과정에 구소련, 중국이 참여하게 됩니다. 구소련은 인도를 지원하고요. 중국은 파키스탄을 지원합니다. 그래서 카슈미르를 놓고, 소규모 국제전이 만들어지는데 이게 구소련의 중재로 전쟁이 끝납니다. 특히 카슈미르에서의 전투 상황은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하고 똑같았습니다. 하나도 달라질 게 없었습니다. 통제선은 그대로 있었고요, 그 통제선에서 인도령과 파키스탄령의 어떠한 면적의 변화도 없이 전쟁은 끝납니다. 제2차 전쟁이 끝나고 나서 파키스탄은 1967년 10월에 파키스탄 하고 중국을 연결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라고 하는데요. kkh라고 합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 건설 계획을 발표합니다. 사실 이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예전에 카슈미르에서 중국을 넘어가는 오아시스 길이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건설한다고 하니까 인도는 긴장합니다. 왜냐하면 제2차 전쟁 때 중국이 파키스탄을 도와줬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파키스탄 하고 중국을 연결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가 만들어지면 앞으로 인도하고 파키스탄이 전쟁을 하면 중국이 그 고속도로로 군대를 보내 가지고 인도가 조금 어렵겠다. 그런 의구심을, 그런 의심의 눈초리를 인도는 보냅니다. 하여간 어찌 됐든 그 건설 계획에 의해서 1979년에 하이웨이가 완성이 됩니다. 그런데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놓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세 번째 격돌할 줄 알았는데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 고속도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격돌하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지금의 방글라데시 과거 동파키스탄이었습니다.
동서 파키스탄 간의 갈등
지금의 방글라데시 중심의 동파키스탄, 서쪽 파키스탄 이렇게 나누어졌는데. 동파키스탄 동쪽 파키스탄은 그쪽에 사람들이 이슬람을 많이 믿지만 이 사람들은 서쪽의 파키스탄 파순족 중심의 서파 키스 탄하고 전혀 이 민종이 다릅니다 언어도 다릅니다. 종교가 같다는 이유로 동쪽의 이슬람 나라 서쪽의 이슬람 나라 두 개의 나라를 만들어 놨거든요. 하여간 그거는 좋았어요. 그렇지만 독립을 하고 나서 동쪽의 파키스탄 사람들은 서쪽의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불만이었어요. 왜냐하면 파키스탄 행정구가 서파키스탄 중심으로 운영이 되고, 그러면서 서쪽에 살고 있는 파키스탄 국민이 1등 국민 동쪽에 파키스탄에 살고 있는 국민은 2등 국민 이렇게 나눠지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의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는 뱅가를 족들이 파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해서 우리 좀 분리 독립하겠다 이런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독립 이후 쌓였던 동파키스탄 주민이 가지고 있는 서파키스탄에 대한 불만이 꿈틀거리는 그 와중에 1970년 11월에 동파키스탄에 큰 태풍 사이클론이 불어닥칩니다. 그래서 한 20여만 명이 죽고요.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그 이재민은 이제 인도로 피난을 갑니다. 그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정부가 재해 대책에 소홀하다고 생각을 하고, 동파키스탄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폭동을 일으킨 과정에 파키스탄에서 파견된 군대가 무차별적으로 주민들을 타격을 하면서 내전으로 비화가 됩니다.
파키스탄 내전
동파키스탄 주민과 파키스탄 정부 간에 내전이 이루어집니다. 내전을 진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인도가 그 내전에 참전을 합니다. 왜냐하면 내전이 발생하면 동파키스탄 주민들이 대거 인도로 몰려들 것이니까 인도의 상황도 별로 안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인도가 동파키스탄 내전에 참전을 합니다. 그러니까 파키스탄이 동파키스탄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군대가 맞붙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전선을 확대시켜야겠다. 생각을 하고 파키스탄이 카슈미르에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게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입니다. 제3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이 벌어지니까 이슬람 연합 기구 회원들은 파키스탄을 지원하지만 인도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그렇지만 1949년에 협정됐던 제1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 때 협정됐던 그 정전성, 통제선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제3차 전쟁 이후 방글라데시로 독립을 하게 됩니다.
인도하고 파키스탄 간의 갈등의 현장인 이 카슈미르는 역사적으로 보면은 주변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침략과 지배를 받았던 그런 땅입니다. 왜냐하면 이 카슈미르가 실크로드의 남방 루트인 오아시스 길에 해당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앞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크로드를 얘기하면서 카슈미르를 말한 적이 있는데 실크로드 중에서 오아시스 길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오아시스 길이 문화를 전파하는 오아시스 길임과 동시에 이민족들이 그 길을 따라서 침략, 침공의 고속도로라고 제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실크로드의 남방 루트의 위치해있는 카슈미르, 그러다 보니까 역사적으로 여러 제국의 침입 통로가 됐던 곳입니다 실제로 이 카슈미르는 기원전 327년경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스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서 이곳 카슈미르까지 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카슈미르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또 시크교가 혼재되어 있는 곳입니다. 게다가 영국이 인도반도를 통치하던 시절에는 이 카슈미르는 당시 카슈미르에 살고 있는 도그라족이 지배하는 카슈미르와 영국 총독부 영국 식민정부가 직할하는 그런 땅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카슈미르 밸리
영국이 직할 통치하는 카슈미르는 앞에서 이야기한 스리나가르를 중심으로 한 카슈미르 밸리였습니다. 여러 제국들의 침입을 받았고, 영국 식민지 때는 둘로 나누어졌던 곳 이곳이 카슈미르였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이 카슈미르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가 혼재하는 곳입니다. 기원전 대략 한 3세기경 인도로부터 불교가 이곳으로 들어왔고요. 이 스리나가르는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가 중국으로 또는 티베트로 탄 나라인 중앙아시아로 전파되는 그 길목이 카슈미르 밸리에 있는 스리나가르였습니다. 불교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카슈미르입니다. 게다가 8세기경에는 파키스탄 아래쪽에 있는 신드 지방으로부터 이슬람이 전파가 되고요. 그다음에 12세기 중반부터는 이슬람 제국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고, 이슬람 샤미르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카슈미르 지방은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 카슈미르 전역은 무굴제국의 지배로 들어갑니다.
무굴제국의 지배
무굴제국의 지배로 들어갈 때는 카슈미르에서 큰 불편, 갈등은 없고 삼대 종교집단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삼대 종교집단 간의 갈등은 없없습니다. 무굴 제국 지배 이후에 무굴 제국이 무너지고 나서 1756년부터 1819년까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세력을 키운 두라니제국 아프가니스탄에서 얘기를 했을 텐데요. 두라니제국의 지배를 받고요. 그 뒤에는 지금의 파키스탄의 펀자브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시크교 왕국 시크 연합왕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들어오는 것이지요.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인도반도를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 인도는 당시 인도반도에서 어떤 세력을 제거해야 인도에 펀자브 지방을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냐 하면은 시크 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이 1845년에 시크족들이죠 시크교를 믿는 시크 연합왕국을 상대로 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몇 차례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제1차 시크 전쟁이라고 합니다. 1845년에 시작된 제1차 시크 전쟁 때 인도에 와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카슈미르에서 활동을 하던 도그라족에게 sos를 청합니다. 그래서 이 도그라족은 동인도회사를 지원해가지고 시크 왕국을 상대로 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영국이 시크 연합왕국을 상대로 한 제1차 시크 전쟁 이후 카슈미르 일대는 도그라족 수족으로 들어갑니다.
암리차르 조약
암리차르 조약이라고 하는데요. 영국 동 인도 회사하고 도그라족 지도자 굴랍 싱하고 조약을 맺습니다 암리차르 조약을 통해서 카슈미르 밸리는 물론이고 지금 현재 인도 땅인 잠무 지방, 카슈미르 지방, 동쪽의 라다크 지방 , 파키스탄 영토인 발티스탄 이쪽이 다 굴랍 싱의 땅이 됩니다. 굴랍 싱의 뭐라고 할까요 왕국이 됩니다. 그 영역을 일명 도그라 군주국 또는 번왕 국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 도그라족이 중심이 된 군주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1947년까지 존속을 합니다. 실제로 1941년에 발표된 인구자료에 의하면 도그 라군 주국이죠. 이 도그 라군 주국은 당시 인도 반도에 있었던 오백여 개의 군주국 중에서 랭킹 4위였다고 합니다. 대단한 위력, 전력을 가지고 있는 큰 규모의 군주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재밌는 것은 이 군주국 도그라 군주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은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 많습니다. 그런데 도그라족은 종교가 이슬람이 아닌 힌두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배계층 도그 라군족의 지배계층은 힌두교를 믿는 사람 피지배계층은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도그 라군 주국 시절 때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이 “자 우리 힌두교 나라가 아닌 이슬람 국가를 만들자 “ 그런 움직임, 그런 반란을 자주 일으키곤 했습니다. 영국이 시크 왕국 하고 전쟁해서 이기고, 그래서 도그 라군 주국을 만들어진다고 했지 않습니까? 도그 라군 주국과의 사이는 어떻게 보면 친영 군주국이었거든요 영국이 카슈미르 일대를 직할 통치해도 될 텐데 왜 굴랍 싱을 지도자로 하는 도그라족들에게 당신들이 지배하시오라고 줬을까 여기에는 영국이 가지고 있었던 중요한 인도반도에서의 전략. 완충 지역이라고 하는 자기들의 이해관계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인도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던 영국은 가능하면 좀 이쪽에 러시아나 좀 이쪽에 중국 하고 가능하면 직접 국경선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후로 중국 하고 국경을 이루는 인도 북부에 카슈미르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동인도회사가 직할 통치하는 영국 정부가 직할 통치하는 그런 영역이 아닌 도그라족들이 대신 통치하는 그런 영역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완충지대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아주 좋은 것이죠.
방파제였던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러시아와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범퍼 존으로 만들어서 서로 충돌을 피했던 그런 관점이었습니다. 하여간 영국은 도그라족을 앞세워서 카슈미르 일대를 간접 통치하는 그런 방식을 채택하고 쭉 이어져 옵니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도반도에서 영국이 철수를 할 그런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인도반도를 독립을 시켜 줘야 되는데 어떻게 독립을 시켜줄까 하는 것이 당시 영국의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인도반도에서는 두 흐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힌두교 나라와 이슬람교 나라 두 개로 분할을 하자고 하는 그런 요구를 하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런 단체가 전인 도무 슬림 연맹이라고 하는 단체가 있었고요. 또 하나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간디나 네로가 중심이 된 인도국민당은 하나의 인도 연방제식의 국가를 만들자. 둘로 나누자. 하나로 하자 이렇게 해서 충돌되는 상황이 발생을 합니다.
영국에 분리 주의 운동에 대해서 하기 전에 저희가 먼저 유럽이라고 하는 지역에 대해서 크게 개념을 먼저 생각을 해볼게요. 자, 유럽이라고 얘기했을 때 유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대륙으로 인지를 하고 있죠. 그래서 어릴 때 배웠을 때는 5대양 6대주 이런 식으로 배웠을 때 우리가 항상 대륙으로 저희가 생각을 했었어요. 근데 유럽이라고 하는 곳에 지도를 보시면은 유럽은 과연 대륙인가 라고 하는 건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가만히 보시면은 아시아랑 그냥 붙어있단 말이죠. 자, 북쪽은 보시면은 바다가 있고요. 바다가 뭔가 갈라놨어요. 다른 땅과, 그리고 서쪽도 보시면은 대서양이 있어요. 그리고 남쪽도 보시면은 지중해가 있어서 아프리카랑 떨어져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동쪽으로 가면은 동쪽으로 가면은 여기는 아시아랑 그냥 붙어있는 땅이에요. 그러면 유럽의 시작은 서쪽에서의 끝은 알겠는데 동쪽에서의 끝은 참 애매한곳이 유럽대륙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유럽이라고 하면 머릿속에 들어오는 곳이 여기여기 서유럽 중심, 동유럽, 여기는 북유럽 하면서 머릿속에 대충 들어오기는 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유럽이라고 했을 때는 전체 육지면적의 7%도 전 지구의 육지면적의 7% 되지 않는 굉장히 작은 지역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대륙이라고 할때는 어떻게보시면 이 판을 가지고 따지기도 하는데요 그 판구조만 보시면 유리사이는 한 판이에요. 하나의 판인데 그 유라시아 판에서 보시면은 전체의 5분의 1정도가 유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복잡한 유럽 지역 국가
유럽을 보시면 지도가 굉장히 복잡하죠. 굉장히 많은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 또 유럽이기도 합니다. 국가가 한 40여개가 많은 국가가 중국보다 조금 더 넓은 그 영토 안에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그 유럽은 우리가 언제부터 유럽이라고 인식을 했을까. 유럽은 하나의 대륙이라고 언제부터 인지를 했을까?를 생각을 해보시면 유럽을 대륙으로 구분했던 거는 굉장히 오래됐어요. 고대시절부터 유럽은 다른 대륙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그런 곳이야. 라고 인지를 했었는데 그때는 언제까지 돌아갈 수 있냐면 우리가 많이들 보시는 교과서 같은데 많이 나오는 게 TO map이라는게 있어요. TO지도. T and O map, 혹은 T in O map 이라고 하는데 동그라미 안에 T자로 물이 흘러가구요. 대륙이 땅이 3개가 있습니다. 그 지도를 보시면요 3개의 대륙이 존재해요. 그 때 당시에 신대륙이 발견이 안됐던 시절이죠. TO맵은 중세시대에 수도원 학자들이 만든 진도인데요. 여기에 보시면은 세 개의 대륙, 구대륙이라고 불리는 세 개의 대륙이 있습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가 있어요. 그런데 이 지도는 다시 어디까지 기원을 찾아 올라갈 수 있냐면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지도까지 올라갈 수 있어요. 그때도 보시면 은 유럽 아시아 리비아라고 써있는데 리비안느 아프리카를 뜻합니다. 이 세 개의 대륙을 가지고 있어요. 고대 학자들은 그럴만해요. 고대에는 지리적인 정보가 사람들이 부족했어요. 이 사람들이 동쪽으로 갈 수 있는 한계도 분명 존재했고요 동쪽으로 저렇게 넓은 땅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때 사람들이 인식하기로는 동쪽으로 가는 길에는 굉장히 좁은 지협이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지협이기 때문에 그걸 기준으로 나누겠다. 라고 하며 유럽을 따로 인지를 했었는데 중세시대만 가더라도 저게 저렇게 광활한 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치만 유럽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은 유럽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유럽은 물리적으로 우리가 구분할 수 있는 대륙이라고 하기에는 좀 힘들다. 라는 얘기가 주류 생각이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구분을 위한 노력
과거에는 물리적으로 유럽을 아시아에서 떼기 위해서 여러 가지 틀을 만들기도 했었어요. 기후적으로 봤을 때는 이런 것 이유로, 아니면 은 이쪽에 우랄산맥이 있기 때문에 우랄산맥을 기준으로 해서 동쪽은 아시아 서쪽은 유럽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우랄산맥이 사실은 굉장히 높은 산맥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족들이 다 그렇게 넘어가서 동유럽 지역까지 들어갔었던 거거든요. 그런데 그 우랄산맥을 간신히 세워놓고 이걸 기준으로 해가지고 여기는 유럽, 여기는 아시아라고 얘기를 했는데 사실은 어떻게 요즘에는 해석을 하냐면은 유럽은 하나의 문화지역이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문화지역, 아시아와는 문화가 굉장히 사실은 다르죠. 저희가 가서 봤을때도 유럽여행을 가는 이유 중에 하나가 거기 유럽의 문화라는 것을 느껴보기 위해서 가잖아요. 그 문화라고 하는 것 우리가 현대 사람들이 인식하기로는 서구문명의 기원이 있는 곳. 그런 곳으로 인식을 하면 됩니다. 굉장히 유명한 지정학 그리고 역사학, 역사지리를 하신 파커라는 교수님이 계신데 이분이 하신 얘기가 뭐냐면요 유럽은 그 안에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해요. 문화적 요소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에 기반한 지역이 유럽이다. 라고 합니다. 그 세가지 문화적 요소가 뭐냐면 그리스 헬레니즘, 그리고 기독교문화, 그리고 기독교문화의 전시인이었던 유대교문화. 해가지고 이 세 가지 문화의 기반을 둔 곳이 유럽이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유럽이라고 얘기를 했을 때는 거기에 물리적인 실체가 딱 있다. 라고 생각을 하시기보다는 여기에 인간들이 만들어둔 일종의 그런 하나의 경계구나 라고 이해를 하실 수가 있다고 보시면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