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왜 다민족 사회일까요? 우리가 봤을 때 영국은 앵글로색슨족이라고 쉽게 생각을 할 수 있는데요. 여기가 앵글로색슨족이 예전부터 살던 그런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앵글로색슨족은 게르만족의 일파예요. 게르만족들이 예전에는 유럽의, 서유럽지역에 살던 민족이 어니였거든요. 이들은 저쪽 북유럽 지역에 살고 있다가 로마가 멸망하면서 권력의 공백상태가 돼요. 서부 유럽, 남부 유럽 이 일대가 권력의 공백상태가 되고 그리고 빙하기가, 소빙기가 옵니다. 소빙기가 오자 북유럽에 살던 게르만족들이 살기가 힘들어져요. 농사를 짓고 살기가 힘들어지는데. 이 사람들이 그래서 배를 타고 내려오기 시작을 해요. 배를 타고 유럽 본토지역으로 내려와서 여기에 살기 시작하는데 이 사람들은 조금 더 추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잖아요. 거기에서 농사도 짓고 먹고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사람들이에요. 그에 반해서 본토에 살고 있었던 유럽 사람들은 좀 더 편안한 기후에서 살던 사람들인데 추워졌어요. 그러다 보니까 게르만족들이 자신들의 농경 기법을 이용해서 이 지역을, 이 지역에서 조금 더 추워진 유럽에서 농사도 짓고 잘 먹고살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자, 이제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열심히 다른 민족들을 다 옆으로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게르만족들이 유럽에 대부분을 이제 서유럽지역으로, 중부 유럽지역으로 다 차지하게 되고요, 그들이 어디까지 들어가냐면은 영국의 본섬인 브리튼 섬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켈트족
그 이전에 브린 틈 섬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켈트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물론 켈트족 이전에도 영국에서 발행하는 역사책 같은 것을 보시면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라고 얘기를 해요. 그리고 신석기 유물도 거기에서 많이 발굴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전부터 살고 있었으나 이들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본격적인 인간의 역사는 켈트족들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시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켈트족들이 살고 있었던 그 브리튼 섬에 게르만족들, 앵글족과, 색슨족들이 들어가면서 이들을 밀어내기 시작해요. 본토에서 올라갔기 때문에 남동쪽에서부터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켈트족들은 북쪽으로 올라가고요 서쪽으로 넘어가게 돼요. 그러면서 켈트족들이 어디로 넘어가게 되냐면 웨일스 지역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지역까지 넘어가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 브리튼 섬에 노른자, 지금 런던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 지역을 차지한 앵글족과 색슨족들은 일곱 개의 작은 소왕국을 만듭니다. 작은 소왕국을 만들었었고요. 그 소왕국이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 왕국이 돼요. 통합 왕국을 만든 사람이 에그버트 왕이라고 웰 식스 왕국의 왕이었다고 하는데요, 이 사람이 통합 왕국을 만들어서 잉글랜드의 기반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웨일스 지역 침입과 통합
이후 잉글랜드의 기반을 만들어 놓고 그의 아들은 웨일스를 침입을 합니다. 웨일스를 침공을 해서 1200년대 말에 웨일스까지 합병을 시켜버려요. 웨일스까지 합병을 한 게 1200년대 구요 1500년대에 가면은 헨리 8세가 등장을 합니다. 1500년대 헨리 8세는 공식적으로 웨일스를 연방의 통합을 시켜버렸어요. 잉글랜드, 웨일스가 하나의 연합국가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웨일스는 잉글랜드와 합쳐졌어요. 웨일스와 잉글랜드가 합쳐졌고요. 그러고 나서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가,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을 겸임하게 됩니다. 이게 왜 그렇게 됐냐면 요. 잉글랜드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사후에 자녀가 없이 사망을 하게 되자. 자 그러면 이제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은 혈중에서 찾아야 하는데 스코틀랜드의 왕이 사촌이었어요. 자, 그래서 이제 스코틀랜드 왕이 그러면은 제임스 6세 당신이 잉글랜드의 왕까지 겸임하시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거기에다가 플러스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됩니다. 그러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어쩔 수 없이 하나가 되어버리는 이런 상황이 되는 거죠. 그때가 1603년이에요. 그러면서 유니온 잭이 등장하게 됩니다. 제임스 왕 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합쳐진 거예요. 그리고 그건 1700년대 되면 공식적으로 다시 통합과정을 거치게 되고요 거기에다가 1800년대에 가면 아일랜드까지 지속적으로 침공해왔던 아일랜드까지 통합을 시키면서 현재의 유니온 잭으로 국기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리주의 운동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페인, 우리나라에서 관광지로 굉장히 유명해진 곳이 스페인이죠. 한국 분들이 굉장히 많이 가시는 곳인데요. 거기에 또 분리주의 운동이 사실상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하는 스페인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해 보시면 투우라든지 아니면은 정열적인 춤, 플라멩코, 그리고 많은 분들이 반잠을 새워가면서 보는 축구로 많이 유명하죠. 과거에는 젊은 청년들이 아니면 축구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축구 직관을 하시려고 열심히 스페인에 가셨는데요. 요즘에는 또 유명해진 게 하나가 있어요. 산티아고 지역을 지나가는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그래 가지고 미디어에 여러 차례 조명이 되면서 사람들이 명상을 하면서 다니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면 순례길이라는 것이 예전에 기독교도들이 다니는 그런 길이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스페인의 정체성을 보여주기도 하는 그런 사례로 보실 수가 있습니다. 유럽 사람들, 특히 북유럽에는 해가 잘 뜨지 않아요. 해가 여름에는 좀 많이 뜨지만 겨울에는 해가 굉장히 짧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지중해 쪽으로 많이 놀러 가게 되는데요, 스페인도 그들이 선호하는 도착지 중에 하나입니다 특히나 스페인의 남부지역 그 지역에 있는 코스타델솔이라고 하는 태양의 해변이 있어요. 거기는 유럽인들을 굉장히 좋아하는 관광지로 부상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 스페인이 위치하고 있는 곳, 스페인은 반도 국가죠. 반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도 천안 쪽에 위치한 반도에 위치해 있는데 스페인이 위치한 그 반도가 바로 이베리아 반도입니다.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 바로 옆에 있는 국가죠, 굉장히 잘 아시죠.
스페인의 지리적 위치
포르투갈이라는 국가가 서쪽에 하나가 있고요, 그 이베리아 반도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밑에 아프리카를 바라보고 있는 지중해의 초입에 있는 지브롤터라고 하는 지역이 있어요. 여기는 스페인에서 계속해서 스페인의 땅이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지만 영국령으로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지브롤터입니다. 지브롤터는 영국인들은 여기는 계속 영국 땅이야 라고 예전부터 주장을 하고 있는 곳이고요. 그리고 현재는 거기 주민들도 투표를 통해서 영국에서 먼저 제안을 했어요. 그럼 투표를 통해서 우리 여기가 어느 땅에 속하는지 확인해 보자라고 이제 주민투표에서 사람들 대부분이 영국의 속하기를 원하면서 아예 영국령으로 남게 된 것이 바로 지브롤터입니다. 이베리아 반도라는 이름은 어디에서나 나왔냐면요. 라틴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히베리아 라고 하는 말인데요. 이 히베리아라고 하는 말은 스페인에서 이제 두 번째로 큰 강이에요. 에브로(evro) 강이라는 강이 있는데 그 광의 주변지역을 히베리아 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히베리아 라는 말이 바뀌고 바뀌고 바뀌면서 이베리아라는 말로 정착이 됐다고 합니다 그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스페인 안에서 분리독립 혹은 스페인 정부에 대해서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던 곳, 강한 세력이 있었던 곳, 저희는 딱 2곳만 볼 거예요. 하나는 카탈루냐입니다. 카탈루냐가 독립하고자 한다 라는 것은 일반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건 2014년에 있었던 독립 투표로 많이 알려지게 됐고요. 그리고 또 한 곳은 어디 되면은 스페인의 북서부 위쪽에 있는 바스크라고 하는 지역이 있어요. 이게 두 곳에서 분리독립 혹은 강한 자치권의 실현을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 독립해서 나가고자 혹은 자치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이런 지역들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저희는 이제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스페인을 조금 아셔야지, 그리고 지금 스페인의 역사 문화를 조금은 이해를 하셔야 왜 그들이 스페인 중앙정부와 함께 하지 않겠어라고 얘기를 하는지 이해가 더 쉽습니다. 먼저 스페인이라고 보면 우리는 그냥 스페인이라고 불러요. 스페인은 스페인이지라고요. 그렇지만 스페인의 영문명, 풀네임을 보시면요 킹덤 오브 스페인이에요. 킹덤 입니다. 킹이 존재하는 스페인 왕국이고요. 저희는 그냥 킹덤 오브 스페인 혹은 스페인이라고 부르지만 이 사람들이 더 선호하는 국명은 에스파냐, 이 사람들 은 에스파냐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킹덤이라고 된 것이 사실은 70년대 후반부터 거든요. 이미 이전에는 킹덤이었긴 했으나 공화정이 들어섰고 그 이후에 다시 킹덤으로 바뀌긴 한상황이에요. 이후에 들어선 왕은 사실 크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왕이라 볼 수는 없고요. 굉장히 상징적인 존재로 보시면 됩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거의 비슷한 존재, 크게 실정에는 관여하지 않지만 상징적으로는 의미가 있는 그런 왕정을 가지고 있고 유지하고 있는 곳이 바로 스페인이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스페인? 에스파냐?
이 스페인 사람들이 자신의 국가 이름을 에스파냐라고 부르기를 원한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에스파냐라고 했을 때 그 에스파냐는 어디서 나오냐 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봤을 때 스페인은 그리스에 비하면 서쪽에 위치해 있거든요. 그러니까 서쪽 해가 지는 쪽, 서쪽 땅, 그래서 그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헤스 페리아에서 그 단어가 유래하게 됩니다. 헤스 페리아가 에스파냐로 바뀌게 되는 거고요. 그리고 저희가 여기에서 나온 또 다른 단어가 히스패닉이라는 단어가 하나가 더 있어요. 미국에서 보면 유색인종들, 특히 남미 쪽에서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을 지칭해서 쓰는 말이 히스패닉 이잖아요 다 같은 말이 같은 유래에서 나온 단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스페인의 지형을 간단히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요. 구릉성 산지가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유럽의 많은 지역이 동일한데요. 유럽에 있는 산맥은 대부분 동부 쪽에서 서로, 동서로 이렇게 가로놓여 있어요. 남북으로 올라가지 않고 동서로 가로놓여 있는데요. 스페인도 마찬가지로 큰 산맥 네 개가 지나가는데 산맥이 대부분 동서방향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산맥이 동서방향으로 놓이게 된 거는 기후에 나중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게 되는데요. 스페인도 그렇고 유럽 전체적으로 봤을 때도 유럽은 굉장히 해안선이 긴 지역이에요. 해안선이 긴 지역이고, 그 해안에 지나가는 바닷물이 난류가 지나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남북으로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맥이 없어요. 남북 산맥이 없고 동서로 지나가는 산맥이 있기 때문에 바다 쪽에서 서쪽에서 편서풍이 지나가게 되면은 따뜻한 바다의 온기를 머금은 바람이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후가 유럽의 대부분의 경우, 굉장히 북쪽에 위치한 그런 유럽의 경우에도 기후가 굉장히 막 시베리아 벌판 같은 이런 기후는 나타나지 않고요. 해양성 기후가 많이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스페인도 마찬가지로 남복 방향에 높은 산맥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바다에서 대서양에서 들어오는 따뜻한 기운이 안 까지 쏙 들어가게 되고요. 그리고 스페인 밑을 보시면 바로 지중해가 있어요. 그래서 지중해를 바로 갖다가 붙여 놓은 기후가 있죠. 지중해성 기후, 그래서 스페인의 남부는 지중해성 기후가 굉장히 많이 발달된 지역, 저 북유럽 사람들이 여름만 되면 햇볕을 쬐기 위해 내려오는 그런 해안가가 발달하게 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이 남부지역에서는 지중해성 기후가 많이 발달을 해요. 그리고 이 내륙지방에서는 온화한 기후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중부지역에는 약간의 고도가 있는 메스타 고원이 있는데, 이 고원 지방에서는 온대 기후, 그리고 농경이 굉장히 용이한 그런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요. 이제 스페인의 문화를 보시면 유럽의 문화가 굉장히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는 한데 저희가 이제 크게 남과 북으로 나눠서 이제 볼 때는요. 남쪽은 로마, 라틴문화권, 그리고 이제 북쪽에 올라가면은 게르만 문화권으로 크게 구분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페인은 어디에 속하냐 하면은 남쪽에 속하게 돼요. 지중해 문화권에 함께 속하는데요. 지중해 문화권, 여기는 그리스 로마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은 라틴문화권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 라틴문화권의 특징 중의 하나가 게르만 문화권과 차이가 나는 것이 게르만 문화권에서는 버터를 기름으로, 식용 기름으로 많이 쓰는데 이 라틴문화권에서는 올리브유를 굉장히 많이 씁니다. 올리브 같은 경우에는 북쪽으로 올라가면 재배가 안 되거든요 남쪽에서는 자신들이 많이 재배할 수 있는 올리브에서 기름을 짜서 그거를 식품에 많이 넣어서 사용하는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그 지역이 바로 라틴문화권이고 스페인은 그 라틴문화권에 속한 지역으로 보시면은 돼요. 자 스페인어도 로마어, 라틴어에 기반한 그런 로만스어 계열에 속한다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스페인을 보시면은 그 안에 로마의 유산도 굉장히 많이 남아 있고요. 그리고 실제로 로마의 지배도 수백 년간 받기도 한 지역이 바로 스페인입니다. 그래서 스페인을 보시면은 그 안에 로마의 문화, 특히 로마는 수로를 굉장히 잘 만들었어요. 수로 같은 것도 현재 굉장히 잘 남아 있는, 원형 그대로 잘 남아 있는 것도 찾아보실 수가 있습니다. 자 이제 스페인어는 스페인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우리는 스페인어 혹은 스페니쉬라고 많이 얘기를 하죠.
스페인의 지리와 나누는 기준
그 스페니쉬는 스페인의 중심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카스티야의 방언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 카스티야의 언어가 현재 스페인의 표준어로 자리 잡게 되고요. 그 외에도 다른 지역에서는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있어요. 특히나 이제 저희가 이후에 공부하게 된 카탈루냐 나 바스크 같은 경우에는 자신들의 언어를 이미 가지고 있었던 지역이지만 스페인어로 쓰면서 지금 하나의 국가이기 때문에 거의 다 통용이 되는, 스페니쉬를 사용하고 있는 지역이다라고 저희가 크게 보실 수가 있습니다. 스페인을 저희가 굉장히 사실 우리나라보다 몇 배는 더 큰 나라잖아요. 여기를 문화권을 크게 네 개로 나눠서 생각을 해 볼 거예요. 북부가 있고요, 동부가 있고 중부가 있고 남부가 있어요. 왜 이렇게 나누냐면요. 이게 과거의 누가 어디, 어느 지역을 점령했었느냐, 어떤 왕국이 있었느냐, 어떤 종교를 믿었느냐, 이런 걸 기준으로 그리고 지리적 기준을 더해서 저희가 나눈 건데요. 일단 북부지역을 보시면 피레네 산맥이 위에 프랑스랑 경계를 나눠주고 있죠. 그리고 북부지역은 이슬람 세력이 올라가지 못했던 지역이에요. 이슬람 세력이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던 지역, 그리고 쉽게 이해하려면 산티아고 순례길이 지나가는 그 통로가 바로 북부지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가 굉장히 잘 간직된 지역으로 보시면 되고 동부지역은 바르셀로나를 생각을 하시면 돼요. 여기에는 과거 아라곤 왕국이라는 것이 있었던 그 지역이고요. 여기는 지금 저희가 생각하는 카스티야 중심의, 마드리드 중심의 스페인과는 조금은 다른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 오는 지역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 일대는 피레네 지역, 피레네 산맥 바로 밑에 있기 때문에 피레네 산맥을 건너가면 프랑스예요. 그래서 프랑스와, 특히 프랑스 남부지역, 프로방스 지역과 일정 부분 문화를 공유하는 그런 지역이기도 합니다. 중부지역은 수도 마드리드를 포함한 전통적인 카스티야 중심의 그 지역으로 보시면 되고요. 여기는 약간의 고원지대 이기 때문에 밀농사가 굉장히 잘 되고 농업 국가인 스페인의 명성에 맞게 농사가 굉장히 잘 되는 지역으로 보시면 돼요. 그리고 남부지역, 스페인 남부지역은 바로 밑에 지나가면은 바다, 굉장히 넓지 않은 바다를 지나가게 되면 바로 아프리카가 나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쪽에서 올라온 무어인들이 한동안 지배를 했었던, 또 굉장히 오래 지배하고 있었던 지역이에요. 그래서 과거 이슬람 문화권 이기도 하고요.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알람브라 궁전, 그라나다, 세비야 이런 지역에 위치한 곳이 바로 남부지방입니다 그래서 이 남부지방에서는 이슬람 식의 건축물 이라든지 아니면은 저 아프리카 계열의 그런 문화적 풍습이 여태까지도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 바로 저 남부지역으로 보시면 됩니다.
홋카이도 북쪽,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 4개 섬에 대한 일본의 억울함이라고 할까요? 일본의 아쉬움은 대단한 것이죠. 왜냐하면 사실 홋카이도 바로 붙어있는 4개 섬은 지금까지 러시아의 땅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패전하고 그리고, 러시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죠. 사실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러시아 하고, 일본이 국교를 체결할 때 그때 협정됐던 영역에 의하면 쿠릴열도 중에서 북쿠릴열도는 러시아, 남쿠릴열도는 일본 그러니까 사실 일본땅이 맞다고 해도 사실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은 줄기차게 러시아에게 적어도 남쿠릴열도는 아니더라도 그 홋카이도에 붙어있는 4개의 섬은 달라고 요구를 하는 겁니다. 그 4개의 섬은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몇 가지 근거, 일본이 주장하는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으로 4개 섬은 일본땅이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러시아하고 일본이 맨 처음에 체결한 1855년에 러일 통상 우호조약일 때도 4개 섬은 일본땅이었고요. 그리고 1875년 일본과 러시아의 영토 교환 조약 때도 일본 땅이었고요. 그다음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나서 만들어진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 때도 4개 섬은 일본땅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이 4개의 섬도 홋카이도와 붙어있는 4개의 섬도 러시아로 주라고 하는 그 표기가, 그 기록이 없기 때문에 북방 네 개 섬은 일본 영토가 돼야 그게 합당하다. 그게 합리적이다. 이게 일본의 주장입니다. 뭐 그럴듯합니까? 뿐만 아니라 일본이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들고 있습니다.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역은 쿠릴열도다. 근데 쿠릴열도에서 홋카이도에 붙어있는 4개 섬은 이게 러시아 땅으로 보내야 된다라고 하는 그 명확한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자 기록이 없으면 이것은 일본땅인 거 아니냐. 왜? 역사적으로 계속 일본땅이었으니까요. 그런 논리로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로 해서 당신들 땅도 아닌 그 북방 4개 섬을 내놓아라. 반환하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여기에 대해서 절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본은 홋카이도 바로 붙어있는 4개의 섬을 자기들 표현으로는 북방영토라고 합니다. 북방영토라고 하는 이유는 자기 들땅인데 러시아에서 강제로 점령해서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한 상징적인 호칭, 상징적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일본을 여행하다가 도쿄, 일본의 도쿄를 가서 도쿄역이나 큰 젊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부야역 이 근처를 가면요. 일본의 보수우익단체가 검정 색깔로 큰 대형버스, 보수우익단체가 북방영토를 돌려 달라고 하는 큰 현수막을 내 걸고요. 일본의 옛날 국기도 내걸고 북방 4개 섬을 돌려달라 그런 캠페인을 거의 매일 합니다. 일본이 이 4개 섬이 북방영토라고 호칭하는 것에 대해서 러시아는 내심 불쾌해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러시아의 땅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다가 러시아도 약간 태도를 약간 바꾸기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1956년 10월에 당시 일본 하고 구소련 일본 하고 소련이 공동 선언을 하고요. 앞으로 양국 관계가 아주 좋아지면 평화스러워지면 평화조약이 만들어지면 홋카이도 하고 인근 한 그 4개 섬은 특히 그 네 개 섬 중에서도 하보마이와 시코탄은 일본에 양도할 수도 있다고 하는 이런 뉘앙스를 풍깁니다.
영토 반환을 거부하는 러시아의 주장
구소련은 일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일본하고 미국이 1960년에 쉽게 말해서 미일 안전보장 조약을 맺거든요. 이 안전보장 조약에 대해서 구소련은 탐탁지 않아했습니다. 1960년 일본 하고 미국 간의 안전보장 조약이 그러면서 체결되고 러시아가 내걸었던 조건, 일본에 외국 군대, 미군을 지칭하는 겁니다. 외국군대가 철수한다고 하면, 철수시키면 홋카이도와 붙어있는 두 개 섬은 일본으로 돌려줄 수 있다. 그런 조건은 일본을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북방영토에 대한 러시아와의 뭐라고 할까요 반환 협정, 여기에 대한 속도를 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북방영토를 가지고 오기 위해서 러시아에게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고, 또 아주 절의의 경제차관을 제공합니다. 그러다가 고르바초프 러시아 대통령이 일본의 경제지원을 요구, 유도하기 위해서 우리 입장이 잘 우리가 경제활동이 경제교류가 잘되면 영토문제 이것은 쉽게 해결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유연한 입장을 피력합니다. 뒤이은 열친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 대규모 경제지원을 요청하면서 홋카이도 인근에 있는 4개의 섬을 우리가 단계적으로 일본과 러시아 관계가 좋아지면 단계적으로 반환할 수도 있다. 반환하는 것, 이것을 고려해보겠다. 이런 조건을 바칩니다. 재밌는 것이죠. 그러다가 푸틴 대통령은 2001년에 일본 하고 러일 정상회담을 하면서 훗카 이토 가까이에 있는 하보마이와 시코탄 이 두 개의 섬은 우선 양도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쿠릴열도 반환 요구
또 이런 뉘앙스를 펼칩니다. 하여간 그 때문에 일본은 열심히 러시아를 상대로 해서 섬 반환 요구를 합니다. 일본은 두 개의 섬이 아니라 네 개의 섬 , 반환을 계속 요구하면서 러시아의 두 개 섬과 일본의 네 개 섬 여기에서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계속 진도를 빼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됩니다.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북방영토를 돌려달라고 요구해도 안 주니까 일본은 자국민에게 네 개의 섬은 일본의 교유한 영토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1981년부터 북방영토의 날을 지정해가 지고 지금 여기 포스터 보이지 않습니까? 북방영토의 날을 지정해가지고 대대적인 국민캠페인을 전개합니다. 북방영토는 일본땅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 러시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우리 가계 속 달라고 해도 러시아는 여기에 일절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러시아에게 우리의 요구조건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 캠페인을 매년 북방영토의 날을 기점으로 해서 그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방영토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 간의 협정에는 협상에는 거의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북방 4개의 섬을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 간의 영유권 다툼은 단순히 그 4개의 섬에 대한 영토싸움이 아니라 태평양으로 열려있는 극동 바다를 러시아가 차지하느냐 아니면 일본이 차지하느냐 사실 그 싸움입니다. 사실 어렵게 어렵게 부동항을 찾은 블라디보스토크도 거리가 멀어가지고 부동항 역할을 못합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나가는 중요한 교두보인 블라디보스토크에 해군기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기점으로 해서 태평양으로 나가야 하는데 태평양으로 나가려고 하면 홋카이도 위쪽에 있는 4개의 섬은 필연적으로 필히 러시아 땅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땅을 러시아는 일본에게 내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본이 줄기차게 요구를 해도 , 러시아가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가 홋카이도 바로 인근에 있는 4개의 섬을 놓고 다투는 이유는 극동의 바다를 러시아 것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일본의 것으로 할 것이냐 그 바다 싸움에 전초전이라 그렇게 설명을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가장 폭력적으로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폭력적으로 라도 우리는 여기에서 떨어져 나가겠어라고 주장을 하는 곳 그래서 IRA라고 하는 군인 군부대죠. Irish Republican Army라고 하는 IRA가 활동하는 땅 북아일랜드입니다. 이 북아일랜드가 위치한 아일랜드 섬에 위치를 보시면요 굉장히 고위도에 위치하고 있어요. 북위 51도에서 북위 55도인데요. 우리나라보다 되게 되게 높은 고위도, 북극이랑 굉장히 가까운 지역이거든요. 여기에 위치한 곳이 아일랜드입니다. 잉글랜드라고 하는 쪽에서는 조금 서쪽으로 위치하고 있는 곳이고요 고위도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예전에 빙하 지형도 많이 남아있는 곳이죠. 아일랜드예요. 그래서 굉장히 고위도에 있으면 추워서 못살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유럽은 편성풍의 영향 대에 위치해있고요. 그리고 섬이다 보니 여기에 바닷물에 해수의 온도에 굉장히 많이 영향을 받습니다. 여기는 난류가 지나가는 곳이에요. 난류가 지나가고 편서풍이 들어오면서 따듯한 바람이 이 아일랜드산, 영국 본토까지도 쭉 들어가는 그런 지형이기 때문에 온도 자체는 크게 낮지는 않은 지역이죠. 아일랜드 지역입니다. 그래서 생각보다는 온화한 날씨를 가진 곳, 그렇지만 여름에는 해가 굉장히 길고 밤 10시까지도 밝고 하지만 겨울이 되면 굉장히 일찍 해가 일찍 떨어지는 그래서 우리가 고위도임을 알 수 있는 지역입니다. 아일랜드이고 영국이다라고 보시면 돼요. 아일랜드는 영국이랑 사실 영국 본토 브리츤섬이랑 굉장히 가까워요. 저쪽에 있는 스코틀랜드 쪽에서 넘어가는 그 길을 보시면 바닷길이 한 20KM 정도밖에 안 되는 그리고 웨일스에서 넘어가는 길도 보시면 한 70KM 정도밖에 안 되는 굉장히 가까이 위치한 섬입니다. 그러다 보니 브리튼 섬을 점유했었고 브리튼 섬에서 주류 세력이 됐었던 앵글족과 색슨족, 잉글랜드 사람들이 더 쉽게 아일랜드를 정복하러 넘어갈 수 있었죠. 아일랜드 사람들에 민족적인 특성을 보시면 그들은 대부분 켈트계입니다. 켈트계 앵글족과 색슨족이 들어오면서 쫓겨났었던 그리고 그 이전부터 거기서 살고 있었던 캘트족들이 많이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한 곳이 아일랜드입니다. 현재는 대부분 언어는 영어를 사용해요. 특히 그 북아일랜드의 경우에는 언어가 대부분 영어를 쓴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 아일랜드 얘는 아일랜드 어가 제 1국가어로 되어 있고요, 영어는 제 2국가어로 지정은 해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영국의 지배가, 잉글랜드의 지배가 꽤나 한 700년이 넘게 지속돼 온 곳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를 쓸 수 있는 지역이 아일랜드입니다. 그리고 이 켈트계의 주민들은 구교라고 하는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영국은 종교개혁을 한번 하죠.
영국의 종교개혁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영국 성공회라는 신규로 바꿉니다. 종교를 바꾸게 되는데 이 켈트 계주 민들은 이 아일랜드에 살고 있던 켈트계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가톨릭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라고 보시면은 돼요. 그래서 자기들이 갖고 있는 켈트계, 라는 민족적인 특징, 거기에다가 가톨릭이라는 종교적인 특징. 이게 합쳐져서 IRISH, IRISH이지만 이 사람들은 켈트인이라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문화를 만들어 가게 되는 거죠. 아일랜드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호성인 사람으로 삼는 사람은 성 패트릭입니다. 세인트 패트릭인데요. 이 사람은 아일랜드에 들어와서 굉장히 기독교를, 이때 당시에는 가톨릭이죠. 가톨릭을 굉장히 열성적으로 전파한 사제로 보시면은 됩니다. 그래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톨릭화 된 것이 이게 바로 아일랜드의 역사라고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이 영국을 보시면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라고 하는 이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는 날이 하나가 있거든요. 이게 3월 17일입니다. 이날이 성 패트릭이 사망한 날인데요. 이분을 기리기 위해서 초록색 옷을 입고 그리고 크로마를, 성 패트릭스의 상징입니다. 크로마를 들고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노는 그런 축제일이 3월 17일. 그날이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입니다. 아이리쉬, 아일랜드 사람들은 그날을 굉장히 큰 축제로 여기고 있어요. 이제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톨릭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켈트다.라는 켈트족이라는 이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잉글랜드 쪽에서 사람들이 브리튼 섬에서 하나씩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아일랜드에 먼저 들어온 것은 게르만족들이 먼저 들어온 것이 아니라요 바이킹들이 먼저 저 북쪽에서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바이킹들이 춥고 먹기 살기가 힘들어지니 노략질을 하러 이제 내려오는 거죠. 하나둘씩 내려와서 여기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은 가지고 가서 살게 되는 이러한 노력질을 하러, 해적질도 하고 내려오는데 8세기에서 한 11세기쯤에 계속해서 북쪽에서 내려와요. 바이킹들이 북쪽에서 내려오면서 이 사람들이 개척한 도시가 어디냐면은 더블린입니다.
바이킹의 정착
항구도시를 개척을 해내요. 그러면 이 이렇게 내려온 바이킹들은 나중에는 여기에서 정착해서 살면서 바이킹의 전통대로 사는 게 아니라 다시 아일랜드 사람처럼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거의 아일랜드화 한 바이킹들이 되는 거고요. 그래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 사람들에 의해서 큰 영향은 없었어요. 그랬는데 잉글랜드에서 점점 앵글족과 색슨족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해요. 이들이 들어와서 아일랜드에 들어와서 땅도 차지하고 여기를 정복하고자 하기도 하고 했으나 이들은 처음에 들어와서는 아일랜드와 합니다. 즉, 아일랜드 사람들이 저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강조한다거나 그러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별문제 없이 이들까지 계속해서 받아들이게 되고요. 오히려 잉글랜드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아이리쉬화 되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거죠. 이제 그랬는데 잉글랜드와 본격적으로 갈등이 시작된 것은 언제냐? 헨리 8세 시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세인트 패트릭, 성 패트릭을 굉장히 중요한 성인으로 생각하고 가톨릭을 굉장히 자신들의 중요한 요소로 민족적 요소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핸리 8세는 개종을 강요하기 시작을 해요. 본인이 종교를 바꾸고 새로 만들었잖아요. 이거를 자신이 지배하는 땅에는 모두 다 강요를 하기 시작을 합니다. 이제 그래서 아일랜드 사람들한테 성공회로 개종하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제 거부를 해요. 거부를 하면은 뭔가 벌칙을 줘야 되겠죠. 어떻게 하냐면은 귀족들을 처형한 다라 덜었는지 아니면 토지를 몰수해가는 자, 이러면서 이 사람들을 못살게 굴기 시작을 해요. 그러면서 잉글랜드 사람들과 아일랜드 사람들 사이에 반감이 생기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뺏은 땅들 그리고 가톨릭 교회에서 뺏어온 땅, 수도원 땅, 교회 땅, 자 이런 것들은 잉글랜드에서 이주한 신교도들에게 하나씩 배분을 하기 시작을 해요. 구교도들은 그리고 이 켈트족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땅이었는데 어느 날 봤더니 았종교를 개종하지 않았다 해서 아니면은 가톨릭 교회가 갖고 있던 땅이라 해서 이게 누구한테 넘어가냐면 신교도들한테 넘어가요. 대부분 앵글족 색슨족 자, 이렇게 돼요. 그러다 보니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 잉글랜드 사람들한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땅도 뺏기고 사람들이 죽어나가기도 하고요. 이러면서 오히려 앵글족 색슨족들은 자신들의 본토에서 별로 땅도 없고 몰락해가는 귀족이에요. 근데 저 섬으로 넘어가면은 왕이 땅도 주고요. 왕이 저기에 가서 잘 살 수 있도록 기반도 마련해줘요. 그러다 보니 잉글랜드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아일랜드로 넘어가기 시작해요. 그래서 이 얼스터 지방, 북동쪽 지방에 잉글랜드에서 넘어온 사람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이 연합왕국에서는, 이 잉글랜드 연합왕국에서는 개척자들을 나중에는 공모까지 하면서 사람들한테 토지를 주고 혹은 토지를 임대해 주고 너희들이 가서 거기에서 살아라.라고 얘기를 합니다. 근데 그 토지는 누구꺼였나면요, 원래 아일랜드에 살고 있던 아일랜드 사람들 것이었어요. 근데 토지를 뺏겼고요 그럼 자신들은 다시 어떻게 살아야 돼요 재임대를 해서 소작농으로 신분이 바뀌게 되는 거죠. 옛날엔 자작농이었는데 소작농으로 신분이 떨어지고 그 사람들한테 세금을 바치며 살아야 되는 입장으로 위치가 전락해버리게 돼요.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 갈등
이제 땅을 다 뺏기면서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에서 갈등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을 합니다. 잉글랜드 쪽에서는 땅을 하나둘씩 뺏어가요. 거기에다 청교도 혁명이 잉글랜드 본토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브리튼 섬에서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왕당파와 의회파가 싸움을 하게 되죠. 그런데 이 아일랜드에 있었던 귀족들은 우연치 않게도 왕당파를 지지를 하게 되고 청교도 혁명에서 의회파가 승리를 하게 되면서 이쪽 아일랜드는 다시 한번 전쟁에서 지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청교도혁명에서 승리한 크롬웨의 아일랜드를 침공을 하고요 토지를 몰수해서 자신들을 지지를 해줬었던 의회파들한테 땅을 다시 한번 재분배를 해주게 돼요. 이 아일랜드 사람들은 땅을 또 뺏기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신들의 땅이 거의 대부분을 잉글랜드에 뺏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18세기 초반쯤 되면은요 가톨릭계가 가지고 있는 전체 토지, 아일랜드 토지의 10%도 되지 않는 상황이 되고요. 18세기 말로 가면 5%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대부분의 땅을 다 개신교도들이 가져가게 되는 거죠. 그리고 1801년이 되면은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섬 자체, 전부다 연합왕국에 합병이 되게 됩니다. 그때 현재의 유니온 잭에 모습이 등장하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연합왕국에 합병된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사람들이 가톨릭교도들을 차별을 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개신교도들은 다른 시민들처럼 시민권을 다 누리고 살고 있는데 가톨릭교도들은 선거를 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선출직에 나갈 수도 없어요. 공직에도 못 나가요. 재산도 소유하기가 어려워져요. 이런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북아일랜드 지역은 보시면요, 인구가 한 200만이 채 되지 않는 그런 지역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개신교도들이 많고 영국에 남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서 여기를 우리 영국에 남기겠어.라고 얘기를 하긴 했으나. 이 사람들을 보시면 거긴 카톨릭계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계, 그리고 아일랜드인, 자 이런 사람들도 꽤 많이 존재하고요 그리고 일부는 개신교계, 그리고 나중에 이제 들어온 사람들이죠. 그리고 영국인들, 나는 그리고 영국이랑 연합해 있는 게 좋아 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 시간이 지났어요. 북아일랜드가 따로 떨어져 나온 지 시간이 좀 지났기 때문에 백여 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잖아요. 그러면서 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상관없어.라고 하는 이런 사람들도 생겨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아일랜드산 사람들의 정체성을 보시면은 굉장히 스팩트럼이 한쪽에 강성해있었던 사람도 있으나 이제 아무것도 상관없어라는 사람도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로 보시면은 됩니다. 자 이제 북아일랜드는 자기네들끼리 독립은 하지 못했고 아일랜드는 떨어져 나갔고 자신들은 계속해서 영국과 붙어서 살고 있단 말이에요. 영국에 하나의 지역으로 남게 되어있어요. 이제 그런데 북아일랜드 정부가 어떻게 했냐면요. 개신교도들의 비해서 카톨릭계를 계속해서 차별을 했어요. 이거는 이전부터 있었던 정책귀조였죠. 계속해서 가톨릭들을 차별을 합니다. 이것에 반대해서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 구교도들, 그리고 민족주의자들 이들이 반대하는 시위를 하기 시작을 합니다. 이것의 시작이 한 1968년쯤부터 시작이 돼요. 이들이 원했던 거는 우리는 개신교도들과 똑같은 권리를 원해요. 똑같은 시민으로서 대접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참정권, 공민권 같은 것들을 주장하기 시작해요. 이 사람들과 영국과의 대립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뭐냐면은 Bloody Sunday라고 불리는 사건이에요. 1972년에 벌어진 사건인데요. 구교도들이 모여서 평화시위를 합니다. 평화시위를 하고 우리도 개신교도들과 똑같은 권리를 줘. 하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엔가 영국군이 발포를 했어요. 영국군이 발포를 했고요. 그 발포로 인해서 시민이 13명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알린 대드와 영국의 갈등
영국 측에서 초기에는 너희들이 폭력적으로 시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라고 얘기를 했으나 이쪽에서 우리는 평화시위를 했는데 너희가 발포해서 무고한 시민이 죽었어.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제 그러면서 아일랜드 사람들과 영국 사이에 갈등이 수면 위로 크게 드러나게 되고요. 거의 괴멸되었던 IRA도 다시 살아나기 시작해요. 이 IRA가 Bloody Sunday에 보복테러를 하게 됩니다. 그 해에, 1972년 7월이 되면 IRA가 다시 한번 폭탄 테러를 너희들이 Bloody Sunday를 버렸으니 우리도 거기에 대해 대응할 거야. 하면서 폭탄 테러를 하게 되고요. 이로 인해서 9명 정도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돼요. 이 두 가지 사건을 본 영국 정부에서는 북아일랜드는 너희는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어. 하면서 아예 의회를 해산시키고 직접 통치하는 방식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북아일랜드 입장에서 봤을 때는 더욱더 안 좋은 상황에 놓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때부터 시작해서 1990년대 말까지 한 30여 년간이 IRA, 아일랜드 사람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영국 정보, 그리고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개신교도들,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개신교도들도 신교도들도 구교도들이 계속해서 IRA로 테러를 한단 말이에요. 자기들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제 이 신교도들도 그것에 대항하는 의용군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무력투쟁을 하기 시작을 해요. 이들 사이에 계속해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한 30여 년간 지속이 됩니다. 그 시기를 The trobles라고 불러요. 그래서 문제가 계속되던 시기를 한 30여 년 동안 거치게 되는데요. 이 30여 년의 트러블 시기를 끝낸 것은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입니다. Good Friday Agreement라고도 하는 평화협정인데요. 1998년에 영국 정부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이 협정이 체결이 됩니다. 그러면서 그다음 해에 자치정부가 수립이 돼요. 이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의 주요 안은 뭐냐면요. 신교와 구교 사이의 권력을 동일하게 공유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갖다 줄 수 있는 이런 협정이다. 이 안을 보시면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영국 사이에 이 삼자 간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권 또한 북아일랜드, 아일랜드, 영국 자신들이 고를 수 있게 해 줘요. 아일랜드 시민권, 영국 시민권, 선택해서 가질 수 있게 하는 거기에다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자유 왕래를 허용을 해줍니다. 아일랜드는 이미 떨어져 나가서 하나의 국가가 됐지만 이 북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을 차단하지 않겠다.라는 거죠.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기존의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이웃이나 자신들의 친척들과 쉽게 왕래할 수 있는 그리고 직장도 아일랜드 쪽에 가질 수 있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 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민 투표를 통과하면서 공식화 되게 되죠. 그 이후에 큰 문제는 없이. 물론 중간중간에 테러도 발생하기도 했고요. 중간중간에 이제 의회를 해산시킨다던지 이런 일들이 발생하기는 했으나 그 와중에도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에 권력을 어느 정도 조절을 해가면서 평화적으로 북아일랜드가 운영이 되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다시 북아일랜드 지역이 이제 떨어져 나가고자 하는 그리고 참 불안정해지는 요소가 발생했는데요. 스코틀랜드와 마찬가지로 브렉시트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브렉시트로 인한 분쟁
영국이 떨어져 나가게 되면 이제 EU에서 떨어져 나가는 거거든요. 아일랜드는 EU에 들어가 있어요. 아일랜드는 EU에 들어가 있는데 북아일랜드는 EU에서 떨어져 나가게 돼요. 그러면 기본적으로 같은 협정 안에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사이에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는 국경이 그어져야 한다.라는 거예요. 이미 국경은 있었지만 이전에는 Soft Board였어요. 그냥 통과할 수 있는. 근데 이젠 Hard Board가 되게 돼요. 이 사람들이 이전에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를 통과하는 도로만 해도 300개가 가까이되고요. 사람들이 지나가는 횟수만 해도 약 3만여 명이 매일매일 지나다닌다 해요. 그런데 여기를 다 검문을 해야 되겠다.라는 거죠. 그러면은 이걸 다 어떻게 처리를 하느냐. 모두 다 지나다닐 때마다 여권을 보여주면서 나가야 되고요. 또 사람 통행에도 문제가 생기고요. 또 물자 통행에도 문제가 생겨요. 우리가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또 가지고 왔다 갔다 하겠죠. 국경을 건널 때는 관세를 매겨야 되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예전에는 같은 관세동맹이었는데 이젠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리고 어떤 데는 EU에 관리를 받고 다른 한쪽은 영국의 관리를 받아요. 똑같은 약이라도 어디선 허가가 되고 어디선 허가가 안 돼요. 그런데 내가 아일랜드에서 사서 영국으로 그냥 쑥 넘어가게 되면은 이건 불법을 저지르는 일이 되는 거죠. 이런 복잡한 일이 생기게 됐어요. 이렇게 되느니 그냥 다시 아일랜드에 들어가서 살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특히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영국에 남느니 EU에 남는 게 더 낫지 않겠니.라고 하는 이런 의견도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북아일랜드에서 어떻게 상황이 진행될지는 지켜봐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스코트인의 땅. 이라고 하는 스코티아라는 마을에서 유래한 그런 단어로 보시면 됩니다. 지명이에요. 스코틀랜드. 근데 이 사람들은 여기에 주류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누구였나면은 켈트계에요. 켈트계들이 여기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계속 살고 있었단 말이에요. 자, 이제 그런데 앵글족과 색슨족들이 들어와서 자기네들이 여기를 합병을 해버린거죠. 왕족들은 이쪽 잉글랜드쪽과 거의 혈통적으로 거의 유사한 사람들이 계속 이 지역을 점령을 하고 있었던거에요. 그러다가 1603년이 되면은 아예 잉글랜드와 하나의 왕을 섬기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리죠. 자, 여러분 스코틀랜드 가시면은 그냥 영어쓰시면은 다 통합니다. 이 사람들 억양이 잉글랜드사람들이랑 약간 다르긴 하지만 스코틀랜드가면 그냥 다 영어 쓸 수 있어요. 그치만 이 사람들이 원래 쓰던 말은 이제 영어는 아니었겠죠. 이 영어는 잉글리쉬죠, 잉글랜드 사람들이 쓰는 말이에요. 자, 이제 이사람들은 원래 스코트어도 있었구요 원주민들이 쓰는 게일어도 사용을 했었는데 이 게일어와 스코트어 같은 경우에는 거의 사멸했다시피 되었다. 라고 보시면은 됩니다. 이 게일어가 사멸하게 된 원인은 가장 큰 것은 일단 지배계층이 잉글랜드 주류였다. 라고 보시면은 되요. 주류 언어가 잉글랜드의 언어인 잉글리쉬에요. 이제 그러다보니 주류계층에 속하기 위해서는 잉글리쉬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해요. 거기에다가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보급을 하기 시작을 하면서 이제 성경책이 보급이 되기 시작을하죠. 이제 성경책. 활자로 찍어놓은 문자가 여기저기 퍼지기 시작하는데. 스코트랜드같은 경우에는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이미 많아요. 거기에다 게일어를 쓰는 사람들은 별로 없단 말이에요. 이제 그래서 성경책을 그냥 영어로만 찍어서 이 스코틀랜드 지역의 다 보급을 시켜버렸어요. 스코트랜드의 영어성경책이 보급이 되면서 사람들은 문자라는 것은 잉글리쉬로 인지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스코틀랜드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다 잉글리쉬를 사용하게 되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요. 스코틀랜드의 지형은 일반적으로 영국 사람들은, 그냥 하일랜드라고 부릅니다. 높은 땅이죠. 고지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지역이 저 스코트랜드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저 고원이 전체 지형의 3분의 2정도를 차지를 합니다. 그러다보니 영국이라는 땅 자체가 농사짓기 딱 좋은 땅은아닌데 여기는 더욱 더 농사짓고 편하게 살기는 농경이 적합한 그런 지형은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역사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보시면요, 여기에는 기도교가 기원 후 한 4세기경 쯤 되면은 들어가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사람들 기독교를 믿기 시작을 하구요. 스코틀랜드에 있던 작은세력들을 11세기경이 되면은 맬컴2세가 다 통합을 시켜버러요. 그래서 스코틀랜드라고 하는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지역으로 통합이 되긴 하는데 이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잉글랜드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요. 식민지가 되었다라는 것은 아니구요. 잉글랜드를 형님으로 모시는 상황정도로 보시면은 됩니다. 잉글랜드의 영향권에 놓여있었으나 잉글랜드는 여기를 계속해서 자신의 종속국가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계속해서 침공을 하고 그 와중에 민족적인 영웅이 한명 등장을 하게 되죠. 이제 좀 오래된 영화이긴 한데요, 1995년도에 개봉한 브레이브하트라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아카데미 작품상도 받은 이런 작품인데 그 한번 보시면요 스코틀랜드의 지형도 굉장히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어요. 그 고지대라는 것이 어떤 지형인지 보실수도 있고 잉글랜드가 어떻게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핍박을 했는지도 확인을 할 수가 있는데요. 거기 주인공이 어떤 윌리엄 윌리스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활약을 하면서 한번에 스코틀랜드를 꿀꺽 하고 삼키지를 못해요. 하지만 윌리엄월리스는 애드워드 1세가 다시 잡아 가면서 런던에서 처형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스코틀랜드는 거의 잉글랜드의 손안에 넘어가게 되었다. 라고 보시면은 됩니다. 그러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1600년대가 되면은 스코틀랜드의 왕이 잉글랜드의 국왕을 겸직하게되면서 통합하게 되는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요. 우선 여기는 1600년대부터 계속 통합되어서 있었어요. 잉글랜드랑 통합해서 통합왕국으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분리독립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기 시작한때가 언제냐면은 19세기 쯤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민족자결주의 막 이런 것들이 많이 등장하던 시기이도 하구요. 그러면서 우리도 웨스트멘스터, 런던이랑은 다른 사람들인데 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표출을 하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일차대전 이차대전을 거치면서 영국의 식민지였다 라고 했었던 그런 지역들 하나씩 다 독립을 해나가거든요. 그러면서 우리도 분리 독립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이런 생각을하기 시작을 하고 그것을 추종하는 민족주의 정당도 등장하기 시작을 합니다.
경제와 스코틀랜드 독립
스코틀랜드가 이 상황에서도 독립을 해야 되겠다. 본격적으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경제적 이유가 굉장히 큽니다. 1970년대에 들어가게 되면은 1970년대를 생각해보시면 서구의 선진산업들은 산업화의 마지막단계라고 보시면 돼요. 산업화가 거의 다 끝났구요. 이제 공장들은 다시 어디로가냐면 인건비가 싼 지역으로 넘어가게되죠. 근데 스코틀랜드는 철강이나, 조선업 같은 지금 우리나라나 중국같은 지역에서 굉장히 강세를 보이는 산업이죠. 이런 중공업이 매우 발달한 지역이었어요. 여기는 항만도 좋고 지하자원이 좋았기 때문에 이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해왔었는데 70년대 쯤되면은 공장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을하죠. 석유파동도 거기에다 겹치기 시작을해요. 이러면서 스코틀랜드 경제화가 굉장히 안좋아집니다. 그때 당시에 총리가 누구냐였나면은 대처총리에요. 대처총리는 미국에 레이건대통령과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그래서 신자유주의를 끌어나갔단 그런 지도자였기 때문에 시장이 그렇게 돌아갔어요. 시장이 그렇게 돌아가면은 어쩔 수 없지 시장이 그렇게 돌아갔으면은 시장에게 맡겨야 되는거야. 하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영국정부에 대해서, 런던 정부에 대해서 굉장히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게됩니다. 정부에 굉장히 경제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 부캐, 스코틀랜드가 끼고 있는 부캐에서 유전이 터집니다. 경제적으로 우리는 여기에서 이득을 볼 수 있어요. 근데 여기에 잉글랜드랑 웨일즈랑 다 같이 나눠 가져야 한단 말이에요. 우리는 경제적으로 산업을 이뤘지만 북해유전을 가졌단 말이에요. 저 위에는 근데 이걸 또 나눠가져야돼. 여기에서 또 다시 불만이 생기기 시작해요. 우리는 북해유전을 가지고 자립할 수 있을거야 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을 하는거죠. 이제 이러면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우리도 독립할 수 있지 않을까 독립을 해야하지 않을까, 라는 이런 당위성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기 시작을 합니다. 그때 많이 역할을 한게 이들의 민족주의 정당이라고 불리는 SNP, Scottish National Party 인데요. 스코틀랜드 민족당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이 스코틀랜드 SNP주도로 해서 1999년이 되면 스코틀랜드에서 자치의회를 부활시킵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자치를한다. 런던에서 너희들 할 것은 뭐냐 국방이랑 외교, 나머진 다 우리가 할거야 라고 하면서 스코틀랜드가 자기들끼리 알아서 살아가는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시작을 하는데요. 이이전까지만 하더라도 199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SNP가 크게 부각됐었던 이런 정당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 정당이 계속해서 민족 주의를 주장을 하고 분리 독립을 70년대부터 계속해서 주장해온 정당으로 보시면 됩니다. 근데 이 70년대를 거치고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다시 2008년에 다시 한번 경제 위기가 오잖아요.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민족주의가 점점 더 드세지기 시작을 해요. 거기에다가 SNP는 점점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여갑니다.
스코틀랜드의 지속적인 독립 주장과 투표
2007년에는 총리도 배출하고 스코틀랜드 내에 총리도 배출을 하구요, 2011년에는 결국에는 다수당이 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SNP 민족주의정당이 스코틀랜드에 다수를 점유를 했어요. 자기들이 의결을 해서 뭔가 결정을 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올라가게된거죠. 자, 그런데 런던정부에서는 계속해서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 긴축정책을 하라고 스코틀랜드에 얘기를 합니다. 스코틀랜드는 거기에 대해서 반대해요.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어 라고 계속 얘기를 하나 런던에서 긴축 정책을 쓰라고 계속 얘기를 해요. 그래서 더 이상은 같이 못가겠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자, 이 스코틀랜드에서는 우리 그러면은 분리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실시할게. 이걸 너희가 인정해줘. 라고 런던에다가 건의를 합니다. 그런데 런던에서는 일방적으로 중앙정부에서는 이런 주민투표를 허가를 잘 안해줍니다. 이걸 해서 진짜로 독립해서 나가면 안되잖아요. 이걸 합법적인 선거라고 인정을해 주는 순간 이 결과는 유효하게 되기 때문에 이걸 인정을 잘 안해주는데 웬일인지 중앙정부에서 이것을 받아줍니다. 독립이 안 될 거라고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걸 받아 주고 나서 2013년에는 너네 진짜 투표해서 나갈 수 있는지 보자. 너희들이 나갈 수 있으면 나가.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게 스코틀랜드를 다시 통과를 하게 되고요. 2014년에 실제로 주민투표를 실시를 하게 되죠. 초창기에는 그래 독립투표, 그래 가결, 독립투표 해 그리고 그 캠페인 와중에는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어요. 아 독립을 하겠어? 라고 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진행이 되고 되고 되면서부터 독립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절반이상으로 나타나는 이런 설문조사 결과도 나오기 시작을 하구요. 여기서 깜짝 놀란 영국정부에서 영국 정부에서 영국 카메란 총리가 직접 스코틀랜드에 가기도 하고 여왕님이 스코틀랜드에가서 우리는 함께해야한다. 하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는 끝에는 굉장히 다급해진 모습을 보입니다. 그치만 결과적으로 독립투표 결과는 부결됐어요. 부결됐구요. 55 대 한 45 정도로 부결이 됩니다. 그래서 이들의 요구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는데 스코틀랜드가 다시 우린 SNP에서 우린 다시 독립투표 할거야. 라고 얘기를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냐면은 브렉시트가 확정이 된 이후에요. 영국이 우리는 EU를 떠나겠어. 라고 하면서 영국 내에서 투표를 하죠. 그때 스코틀랜드는 EU에 남겠다. 라고 하는 것이 다수표였어요.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 북아일랜드, 그리고 런던지역 이 세곳에서는 우리는 EU에 남겠어. 라고 얘기를 하고요. 다른 지역은 그냥 우리는 EU를 떠나도 돼. 라고 하는 투표결과가 나왔다라는 것을 그냥 간단하게 보실 수가 있었어요. 스코틀랜드는 남고 싶었어요, 스코틀랜드는 남고싶었는데 전체적인 결과는 떠나겠다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SNP에서는 계속해서 우리는 이런 결과면은 EU에 남아있는게 낫지, UK에 남아있는거보단 EU에 남아있는게 더 나. 라고 하면서 다시 주장을 하면서 언제 다시 또 독립을 위한 투표를 준비할지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사람들이 특히 카톨릭들이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에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기근으로 인한 상황이 되는데요. 그걸 보기 위해서는 감자를 한번 생각해봐해요. 감자. 감자는 우리가 굉장히 흔하게 먹는 별 볼일 없는 그런 작물 아니야? 라고 생각을 할 수 있는데요. 유럽 사람들이 기존에 먹었던 빵을 만들어 먹었던 밀이라던가 호밀, 이것에 비해서 감자는 열량을 훨씬 더 많이 제공해줄 수 있는 굉장히 유용한 작물입니다. 동일한 땅에 요만한 땅에 밀을 심었을 때, 그 땅에 감자를 심었을 때 감자를 심게 되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수 있는 굉장히 좋은 작물중에 하나가 저 감자에요. 거기에다 감자는 험한날씨에도 잘 자랄수 있잖아요. 그러다보니 영국 브리튼섬이나 그리고 더 험한 땅인 아일랜드 같은 경우에는 감자라는 것은 구원의 작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근데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게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요. 감자 자체가 아메리카, 메소아메리카 푸드라고 보실 수 있죠. 신대륙 작물입니다. 그래서 신대륙을 발견하고 나서야 감자라는 작물을 만나게 된 거구요. 감자를 처음에 보자마자 이렇게 데리고 왔느냐 데리고 온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이 보기에 감자가 예쁘지도 않고 맛있어 보이지도 않아요. 그러다보니 얘를 바로 도입을 한 게 아니고 한 백여년 정도 지나서야 식용으로 아 감자를 쓸수 있구나 , 이걸로 우리가 기근을 해결할 수 있구나 하는 거를 깨닫게 되는 거죠. 그래서 1600년대쯤 되면은 조금씩 조금씩 재배를 하기 시작을 합니다. 재배를 하지만 이게 뭐 고급 음식이라던지 너무너무 맛있는 음식 이런 입장은 아니었어요. 그냥 굶지 않으려고 먹는 그런 작물이였으나 18세기 쯤 되면 정부에서 이걸 감자재배를 장려하기 시작해요. 감자를 먹음으로써 사람들의 기근을 해소할 수 있다는 거를 정보를 깨닫게 된거죠. 이제 그러면서 아일랜드에서도 18세기쯤 되면은 감자가 주요 주식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우리가 영국의 전통음식이라고 얘기하면 피쉬앤칩스라고 많이들 대답하세요. 저 칩스가 저 감자죠. 주식입니다. 피쉬는 메인음식이 되는거고 감자는 우리의 밥과같은 존재로 자리잡기 시작할때가 저때라고 보시면되요. 그 이전에는 감자가 없었어요. 감자를 먹기 시작하면서 아일랜드의 기근이 사라지기 시작을 해요. 그러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를 하게 됩니다. 이거는 아일랜드 뿐만아니라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서 인구가 이렇게 많이 늘어나면 은 우리가 어떻게 다 먹여살리지. 하면서 매서스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생산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우리는 다시 인구를 줄여야될거다. 라고 얘기를 한 때가 바로 이시점이라고 보시면은 됩니다.
감자와 아일랜드 인구증가와 재감소
감자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인구가 거의 2배가량 증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감자를 먹으면서 열량을 보충을 하게 되는데 감자농사가 망했어요. 1800년대 중반에 감자 잎마름병이라는 게 발생하고 그게 아일랜드 전역을 강타를 합니다. 그래서 감자농사가 제대로 안됐어요. 먹을게 없어요. 당장 먹을게 없어요. 당장 먹을게 없는데. 이때 당시 아일랜드인의 상황을 생각해보시면 땅을 다 뺏겨서 소작농의 상황이잖아요. 소작농의 상황인데 내가 먹을 것도 없고 갔다 팔 것도 없어요. 근데 나는 계속해서 세를 지급을 해야하는거죠. 잉글랜드사람들, 혹은 개신교도들한테 나는 계속해서 땅을 사용한 대가를 지불해야되는데 나는 나 먹을 것도 없는데요. 그런데 이사람들은 계속해서 세를 내라고합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이것은 사람 살라고 하는건지 죽으라고 하는 것인지 이런상황에도 막다른 골목에 놓이게 됩니다. 아일랜드사람들이. 감자 잎마름병이 발생하고 거기서 몇 년 지나지 않아 유럽에서 또 콜레라가 유행을 하게 되요. 전염병이죠. 전염병이고 19세기 초반, 중반의 상황에서는 개인위생이라던가. 더군다나 잘 살지 못하는 아일랜드사람들한테의 이 콜레라가 퍼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상황이 됩니다. 그러면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인구가 굉장히 줄어들게 되요. 이게 모두다 사망한 것은 아니구요. 다수는 신대륙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일랜드계 미국인 마을이 여기저기 많이 들어서게 되는 상황이 되구요. 아일랜드 안에서는 엄청나게 많이 줄어들게 되요. 아일랜드의 인구가 이렇게 줄어들게 된 원인, 일단 소작농이였는데 농사가 망했어요. 농사가 망해서 먹고살게 없어요 근데 세는 계속 내야되요. 자, 근데 세를 못냈어요 그럼 더 이상 임대를 못해요. 그럼 다음부터 농사를 못 지어요. 농사짓던사람이 농사를 못짓게되면 이제 뭐를 해야 될까요? 생계수단을 잃어버리게 되는거죠. 그럼 잉글랜드 정부에서는 이들을 지원을 해줘야하는데 잉글랜드 정부에서는 지원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은 지주들은 이들에게 뭔가 시혜를 베풀었냐. 지주들도 막 별로 뒤돌아 서있어요. 이러면서 아일랜드사람들은 이때부터 민족주의가 더 강하게 반응되기 시작해요. 잉글랜드사람들은 우리를 전혀 도와주지 않는 구나 잉글랜드를 우리가 의지하며 살수가 없겠구나. 라고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이제 그러면서 아일랜드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19세기 중반이 되면은 굉장히 활발하게 벌어지게 됩니다. 민족주의 운동은 크게 두 가지 주제라고 보시면 되요. 하나는 땅을 빼앗겼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서러움을 당하고 소작농의 위치에서 이렇게 살기가 어려워졌어요. 이제 그러면서 소작농 연맹이라던지 자치운동 이런 것들을 통해서 토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투쟁을 합니다. 그리고 또하나는 이제 정치적인 투쟁인 독립운동을 하게 되요. 이들이 취한 방식은 평화적 방식은 아니었어요. 이들은 비평화적, 여기저기서 폭탄도 터트리고 어디에서 전쟁도하고 비평화적인 방식, 혁명적 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이때 등장한 것들이 청년아일랜드당,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 등등이 등장을 하게 되는데요. 영국정부에서는 이들을 그냥 두면은 너무나도 크게 들끓었어요. 민족주의가 그러니까 한가지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그 들어준 이야기는 뭐냐 토지문제는 해결해줍니다. 그래서 소작농은 자작농화되는 일연의 과정을 거쳐요. 토지법을 개정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토지문제는 해결이 됐어요. 토지문제는 해결이 됐으나 독립은 영국에서 바로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땅이 떨어져나가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영국에서 바로 해결을 해주지 않아요. 이제 그러면서 아일랜드사람들은 하난 얻었지만 하난 아직 얻지 못한 상황으로 19세기가 지나가게 됩니다. 자, 19세기가 지나가고 이 아일랜드사람들의 민족주의 정당이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정당이 있습니다. 신페인당이라고 하는 신페인당이 20세기 초반에 등장을 하게 되고요. 그리고 이 신패인당에 물리적인 혁명을 지휘하는 IRA라는 단체도 등장하게 되요.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IRA는 Irish Republican Army입니다. Army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폭력적으로 투쟁을 하는 이런 단체로 보시면 됩니다. 영국, 런던에서 봤을 때는 이들은 테러리스트라고 보시면 되요. 신페인당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입장을 제기하구요, IRA를 통해서 혁명적인 투쟁을 진행하는 두 가지 트랙이라고 보시면은 됩니다.
영국과 아일랜드 자치
영국에서도 아일랜드가 너무 너무 시끄러워요. 그러다보니 아일랜드를 그냥 너네 자치해. 자치를 할 수 있게 해줄게. 하는 자치법안을 마련하기로 합니다. 자치법안을 마련을 하기로 했으나 1차 대전이 터지고요. 1차대전 와중이기 때문에 처리를 못해요. 처리를 하지 않고 있고. 그상태로 자치법안은 계속 계류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신페인당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자치를 하고 그리고 이어서 독립을 하고 싶다. 라는 의지를 계속해서 표출을 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신페인 당원들이 의회에 진출을 하기 시작을 해요. 실제로 선거에서 당선이 되게 된 거죠. 이들이 의회에 진출을 하면서 더블린에서 아예 아일랜드 국민 의회라는 것을 개최를 하고 독립선언을 합니다. 우리는 저 쪽 UK에서 떨어져가지고 독립할거야. 라고 하면서 우리는 독립국가다 라고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치만 영국에서는 인정하지 않죠. 인정하지 않고 IRA와 영국군사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요. 하지만 영국도 아일랜드를 계속 이대로 둘 수 없다 하는 것은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1922년이 되면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조약을 하나 비준을 하는데요. 아일랜드 전체에 전부는 아니구요, 개신교도들이 많이 사는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치령으로 분할을 해줍니다. 그래서 26개주는 자치령이 되고요 그리고 6개, 얼스터지역에 속한 6개 지역은 그대로 연합 왕국령으로 남게 되는 이런 조약을 만들게 됩니다. 이런 조약을 만들고 나자 아일랜드에서 독립을 하고자 했던 세력들, 특히 IRA내에서 이 조약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게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다시한번 투쟁을 하게 되요. 내분이죠. 내분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분이 일어나서 우린 이렇게 서라도 독립해서 자치해서 나가야해. 이렇게 일부만 나가는 건 의미가 없다. 라고 하는 두 쪽으로 나뉘게 되고요. 그 중에서 이렇게라도 나가야 된다라고 한다. 하는 찬성파가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IRA는 자기네들끼리 내분으로 거의 괴멸되다시피 된다. 라고 보시면 은 되요. 그래서 1922년에 조약으로 인해서 아일랜드 지역의 대부분 지역은 올스터의 여섯 개의 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아일랜드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초기에는 자치하는 지역이었어요. 자치하는 지역이었으나 여기는 1937년에 아일랜드 자유국은 에이레라고 하는 이름으로 아예 독립을 해버리구요 이름을 49년에는 아일랜드로 변경을 합니다. 그리고 영연방에서 아예 탈퇴를 하는데요, 영연방이라고 하는 것은 영국에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모여가지고 자기들끼리 만든 하나의 조직과 같은 모임이에요. 커머널스라고 하는 모임에서도 아예 우리는 영국이랑 이제 관계가 없어. 라고 하면서 탈퇴를 해버립니다. 그리고 UN에도 가입하고 EU에도 가입을 하면서 독립된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일랜드지역은 26개주 지역은 떨어져서 나와서 지금의 아일랜드를 구성을 하게 되고요 남은 지역이 어디냐 개신교도들이 많이 살고 이 사람들은 영국에 남는 것을 원해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곳 북아일랜드 지역만 남아있어요.
여전히 우리는 독립을 해야겠어하는 두 곳이 있는데요, 첫 번째 나오는 곳은 신장웨이우얼입니다. 여기는 이미 자치구로 지정이 된 곳이에요.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완전 변경지역이에요. 중국에서 변경지역이고요 중국이 개혁과 개방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은 우리나라를 쳐다보고 있는 저 해안가 지역을 회람으로 해가지고 많이 발전을 했는데요. 저 변경지역은 크게 경제적으로 개발되지 못한 곳입니다. 근데 저기를 가만히 살펴보시면 예전, 예전, 예전에 실크로드가 지나가던 그 길이다. 라는 점을 인지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아시아 대륙은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그 길목에 위치한 어떻게 보면은 예전 육상 교통로로서는 굉장히 중요한 그런 요충지로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현재는 중국 정부에서 일대일로라고 하는 이런 정책을 쓰고 있잖아요. 그래서 바다로 돌아가는 바닷길을 하나 개척하고 그리고 육지로 넘어가는 육상 길을 하나 개척을 하는데, 그 육상 길로 넘어가는 그래서 러시아 쪽으로 쭉 올라갈 수 있는 가장 큰 길목에 위치한 곳이 바로 저 신장자치구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장 지역의 지리
요즘 들어서 점점 중앙정부에서, 중국 중앙정부에서, 공산당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 중에 하나가 저 신장 지역이에요. 저기는 별로 경제적으로 잘 살지는 못해요 현재로 봤을 때 잘 살지는 못하고요. 그치만 저기 저 지역을 보시면은 굉장히 면적이 넓죠. 전체 중국 면적의 한 1/6 정도 되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큽니다. 우리나라에 7배가 넘는 크기에 저 면적을 가지고 있는데 저기서 갖고 있는 지하자원이 굉장히 많습니다. 석유도 갖고 있고요. 석탄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고, 천연가스, 희토류 같은 지하자원을 굉장히 많이 광물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지역이 저 신장지역이에요. 그렇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농사를 짓고 살기에는 참 편하지 않은 땅이 저 신장지역이다라고 보시면은 돼요. 그래서 저 광물자원을 개발해서 저기서 경제적 이윤을 뽑아내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쉽게 살기는 어려운 지역이다.라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서유기 - 신장 지역
머릿속에 신장지역을 떠올리시면 서유기를 생각을 하시면 돼요. 서유기에서 광활한 사막을 지나가지고, 타클라마칸 사막 거기가 바로 저 신장지역입니다. 저기에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47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는데요 가장 다수는 위구르족입니다. 위구르 족은 돌궐 족이라고 불렸던 그런 사람들인데요. 이들은 투르크계예요, 투루크 계는 오스만튀르크에 주 측 세력이었죠, 그래서 이 사람들은 코케 이시언이라고 불리는 저쪽 유럽 사람들과 유사한 그런 민족이다라고 보시면은 됩니다. 그래서 캅카스족, 코케 이시안이라고 보시면 돼요. 자 이 사람들이 지금 현재는 혼혈도 많이 되고 다른 민족을 계속해서 지배했기 때문에 혈통으로 봤을 때는 단일한, 독특한 민족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이 사람들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게 뭐냐면요 자신들은 이슬람을 믿는 투르크인이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16세기 경이되면 수니파 이슬람을 수용을 합니다. 그래서 우루무치가 수도인데 거기에 보시면 모스크가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열심히 이슬람을 믿는 그런 지역이죠. 신장 지역이에요. 여기는 위구르족이 50% 약간 안 되게 거주하고 있고, 요 현재는 한족들이 많이 이주해가서 한 40% 정도를 한족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족과 위구르족들 사이에 경제적인 위상을 두면 한족들이 훨씬 더 잘살아요. 특히나 도시화된 곳, 그리고 우루무치같이 수도, 이러한 지역에는 한족들이 훨씬 더 많이 살구요. 오히려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 이런 곳에는 위구르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그런 형편이라고 보시면 돼요.
신장 지역의 역사
위구르족들은 원래부터 여기가 중국 땅이었느냐 여기는 청나라 때 이 지역을, 신장지역을 정복을 하게 됩니다. 청나라가 이 신장지역을 정복을 해버리죠.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기들은 위구르족이잖아요. 만주족이 들어와서 통치를 하다 보니 여기에 대해서 계속 반발을 합니다. 우리는 만주족 지배에서 살 수 없어라고 반발을 하고요. 결국에는 한 백여 년 정도 지나서 만주족을 추방하고 자신들이 동 투르 키스탄국이라는 것을 건국을 합니다. 자신들의 그 민족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국가이름이라고 보시면 되요. 투르크라고 하는 사람들이 저쪽에 터키, 그리고 오스만제국이 서쪽에 있잖아요. 자신들은 동쪽에 있는 투르크족들의 국가라고 보시면은 됩니다. 이 동투르키스탄 국은 오스만 국에서 이걸 승인을 해줘요. 오스만국에서도 승인을 해주고 러시아에서도 승인을 해주고 영국에서도 승인을 해줍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너네는 국가가 아니야. 라고 하면서 승인을 거부를 하고 자신들이 여기 다시 침공을 하게 돼요. 청나라가 들어와서 청나라가 전쟁에 이기면서 다시 청나라로 넘어가게 되는 거죠. 청나라로 넘어가게 되면서 이 지역의 이름을 신장으로 바꾸게 됩니다. 새로운 경계가 되는거에요. 청나라에선 자신들에게 병합당한 땅, 우리의 국경은 저기 끝까지 인식을 하게 된 거구요. 그리고 청나라를 이어받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당연히 우리 땅이라고 인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보시면은 됩니다. 위구르족들이 청나라가 좀 불안하던 시절이 있어요. 무너지기 직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이런 시절에 어, 우리의 지배세력이 정치적으로 좀 불안하단 말이에요. 거기에서 틈을 타서 1930년대에 되면 다시 동투르키스탄이슬랑공화국이라는 것을 건설합니다. 지속적으로 자신들은 국가를, 우리의 독립된 국가를 설립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줬다. 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이 동투르키스탄이슬랑공화국 조차도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망합니다. 붕괴가 되고나서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요. 러시아에 도움을 받아서 1940년대 다시한번 국가를 설립을 했지만 러시아와 중국사이에 이 둘 사이에 몽골과 신장,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처리를 하면서 다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합병하게 되죠. 그래서 이 위구르 족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은 동투르키스탄공화국, 동투르키스탄국가, 우리는 투르크족, 중국이 아니야 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좀 과격하다 보실 수 있어요. 테러도 자주 일어나고요. 이 사람들이 외교적으로 해결을 한다. 보다는 자신들이 몸으로 부딪혀서 하는 그래서 폭력적인 사태도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1989년이 되면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이라는 것을 조직을 해서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데요 요즘에는 주로 타깃이 많이 되는 곳이 요새 우루무치예요. 수도이기도 하고요, 우루무치는 일대일로 사업이, 프로젝트가 벌어지면서 공산당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고 이곳에서 국제회의 같은 것도 종종 열리고, 개최되는 그런 지역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상징적으로 폭탄테러를 한다 라던지 한족들과 위구르족들이 서로 부딪히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위구르 지역 갈등이 지속되는 이유
이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갈등이 벌어지는 이유, 앞에서 많이 설명을 반복하는 것 같은데요. 이제 우선적으로 봤을 때는 위구르족들은 자신들은 독립적인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족들이 들어온 거예요. 한족들이 들어오고 자신들이 갖고 있었던 이 영역을 한족들의 영역으로 합병을 시켜버렸죠. 여기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고요. 그리고 공산당이라고 할 때는 공산당은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종교를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종교를 잘 인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인데 이슬람에 대해서 썩 반기지를 않아요. 이러한 이슬람들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고요. 그리고 한족들이 들어왔는데 이들이 경제권을 다 가져갔어요. 지하자원 개발도 이들이 다하고, 거기서 나온 이윤들도 자기들이 다 가져가요. 원래는 여기는 위구르 땅이었는데, 이렇게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차이가 나게 되죠. 위구르족들은 지속적으로 우리는 그럼 이걸 가지고 독립을 하겠어라고 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다라고 보시면은 됩니다. 여기에 양념처럼 하나 더 들어가는 게 뭐냐면요, 수니파 극단주의 단체들이 이 위구르족들한테 도움을 주게 되죠. 위구르족들한테 너희들도 이제 독립해서 나와서 살 수 있어라고 추동을 하게 되면서 이들이 더 과격하게 할 수 있는, 반항할 수 있는 과격하게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이런 힘을 얻게 됩니다. 중국은 절대로 이들의 분리 독립은 용납할 수 없어요. 여기가 갖고 있는 지하자원도 많고요. 그리고 위구르족들이 독립을 하게 되면 그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됩니다. 55개의 민족이 다 독립해서 나가면 중국은 굉장히 작은 국가로 사이즈가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되겠죠. 이제 그런 것도 다 문제가 되기 때문에 중국에서 절대 용납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신장지역과 티베트 지역을 알아보기 전에 중국에서 소수민족들이 전반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말씀을 드릴 건데요. 중국은 언어도 많고요 민족도 굉장히 많은 그런 국가로 보시면 됩니다. 일반적으로 이 인구 자체가 너무나도 많아요. 14억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언어를 쓰고 동일한 민족이기를 기대하기는 참 쉽지가 않습니다. 중국의 주요 민족들의 분포를 보시면 일단 한족이 여기저기 다 있다고 보시면은 돼요. 한족이 대부분의 지역에 범역적으로 거주를 하고 있고요.
중국이 소수민족 독립을 못 시키는 이유
55개의 소수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중국 안에서도 외곽지역에 많이 살고 있어요. 이 외곽지역이 저 해안가, 우리나라를 마주 보고 있는 저 해안 쪽이 아니라요, 산지역, 그래서 중앙아시아 쪽으로 가는 그 지역의 국경선을 따라서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쪽은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섬 자체도 사이즈가 큽니다. 굉장히 넓은 지역에 걸쳐서 소수민족이 분포하고 있어요. 만약에 중국 정부에 입장에서 봤을 때 저들이 자신들이 분포하고 있는 땅을 가지고 독립을 해서 다 나가서 살겠다.라고 하면은 중국에서 잃어버릴 땅이 너무나 많은 거예요. 그래서 중국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저 소수민족들이 독립해서 나간다.라고 하는 것은 인정하기가 쉽지가 않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소수민족들이 전체 인구의 8. 5% 정도를 차지를 한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러면은 8. 5%는 비중이 굉장히 작네요. 비중이 작아요. 비중이 작지만 절대 숫자로 보시면요 천만명 이상의 민족의 숫자를 가진 이런 소수민족들도 몇 개가 있어요. 좡족이나 후이족, 만주족, 위구르족 이런 소수민족들 같은 경우에는 인구가 천만 명이 넘습니다.
티베트족
티벳족같은 경우에도 오백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어요. 이런 소수민족들이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많이 분포하고 있는 곳이 중국인데 중국에서는 이 소수민족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느냐, 너네 독립하라는 안 한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이 사람들은 그나마 자치구라는 것을 만들어줘서 너희가 그러면 문화적인 독립성을 인정을 해주마. 인정을 해주지만 너희들 정치적으로는 독립할 수 없어.라고 하는 게 중국 정부에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런 중국 정부의 입장이 나오는 뒷배경에 보시면요 가장 큰 배경중 하나는 중화사상이에요. 이 중화사상은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족 문화가 중심이고요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만드는데 는 한족이 중심에 있어요. 지금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나오기 전에는 청나라였잖아요. 이 청나라 시절에 지배세력은 만주족이었어요. 이 만주족도 지금은 심지어 거의 다 한족에 동화되었다고 보시면 돼요. 만주족들의 독립운동, 요즘에 보기가 힘들죠. 하지 않고 있어요. 이 사람들은 거의 중화상에 흡수되었고요. 그리고 민족 융합론, 우리는 하나의 민족을 만들어가지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이끌어가야 돼. 하나의 민족처럼 하는 건 한족처럼 하는 거죠. 이런 식으로 하면서 한족 중심의 사상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갑니다. 그러면서 여기 물리적으로 어떤 식으로 대처를 했느냐 중앙정부에서는 소수민족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여 있으면 자신들의 민족주의가 더 발현하기가 쉬어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다 한족들을 자꾸자꾸 이주를 시켜서 보냅니다. 그러면서 너희들보다 더 우월한 한족들을 보고 이들을 따라 하렴. 이런 정책을 쓰는 거죠. 그리고 거기에 살고 있었던 소수민족들은 한족들이 더 우월하다고 자꾸자꾸 들었어요. 자꾸자꾸 들었는데 저들은 또 경제적으로도 잘살아요. 그리고 우리 동네는 가만히 봤더니 변방지역이에요. 변방지역에서 잘 살지도 못하고 중앙정부에서 투자도 잘 안 해줘요. 그러면은 이 사람들도 경제적인 기회를 찾아서 다시 도시로 떠나게 돼요. 이렇게 되면서 소수민족들은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게 되고 그리고 한족들은 오히려 정부에 지원을 받아서 소수민족들이 살던 변방지역으로 이주를 하게 되는, 이렇게 되면 민족이 서로 섞이게 되겠죠. 민족이 섞이게 되고 그 안에 있었던 소수민족들은 한족이 더 우월해, 걔네는 경제적으로 더 잘 살아. 이러면서 중화사상에 흡수가 되는 이런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소수민족들이 하나씩 하나씩 중화인민공화국에 사상에 젖어들어가게 됐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본이 중국하고 센카쿠, 댜오위다오를 놓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하면 또 일본은 홋카이도 바로 위쪽에 있는 자기들 표현으로 하면 북방도서를 놓고 러시아 하고 영토분쟁을 또 겪고 있습니다. 홋카이도 바로 인근에 있는 그 네 개섬은 쿠릴열도에 최 남단에 있는. 아마 여러분은 쿠릴열도를 잘 알 겁니다. 러시아에 캄차카 반도에서 일본 홋카이도 쪽으로 약간 화살 방향으로 호상 방향이라고 하죠 약간 굽어서 한 55개의 섬과 바위섬으로 줄지어서 있는 그런 열도입니다. 아일랜드 아크입니다. 이 호상 열도 맨 끝에 지금 논란이 되는 북방도서 4개 섬이 있습니다. 이 쿠릴열도는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섬이고요 그래서 지금도 일부 섬에서는 활화산이 분포하기도 합니다. 이 쿠릴열도는 이 쿠릴열도라고 하는 지명은 러시아식 지명이고요. 일본 사람들은 이곳을 치시마라고 합니다. 이 치시마중에서 가장 큰 섬이 이투루프라고 하고요. 일본말로는 에토로후토라고 하는데 이 이투루프라고 하는 섬을 중심으로 해서 위쪽 북쪽은 북쿠릴 그 아래쪽은 남 쿠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남쿠릴로 분리되는 홋카이도 인근에 4개 섬은 지금 현재 러시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보마이 군도, 구나시리, 시코탄, 이툴루프 이 네 개섬인 것이죠. 일본에서는 이 네 개섬을 북방영토라고 합니다. 지금 현재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지만 원래 이건 자기들 땅이다 이런 논리입니다. 이 네 개의 섬의 면적은 꽤 큽니다. 우리나라 경기도만 한 면적의 크기입니다. 꽤 큽니다. 이 네 개 섬을 일본은 러시아에게 돌려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네 개 섬이 실효적으로 러시아가 지배하게 됐는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봅시다. 원래 이 홋카이도, 그다음에 홋카이도 위쪽에 있는 쿠릴열도, 또 조금 멀리까지는 지금은 러시아 영토이지만 사할린, 이쪽에 살고 있는 원래 원주민은 아이누족이었습니다. 지금 말하는 일본 사람들이 아닌 일본 사람들과는 약간 좀 다른, 그런 다른 종족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일본말이 아닌 아이누어를 사용하고 있고요. 외모는 일본 사람들하고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보다도 몸에 털이 더 많이 난,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털이 많다고 해서 한자식 표현으로 하면 모인, 에미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일본이 일본 혼슈에 동북쪽 지금에 아오모리현쯤 됩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홋카이도. 여기를 이제 일본이 편입을 하고요. 그 편입하는 과정에 아이누족들을 일본이 일본인으로 귀화 동화를 시킵니다.
1900년대 일본의 점령
1900년 이후에 일본 정부는 그 아이누족들을 철저하게 일본 인화시키기 위해서 아이누족들에게 아이누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또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고 또 아이누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문화를 말살하는 그런 정책을 펼칩니다. 사실 18세기까지 쿠릴열도는 일본땅도 아니었고 사실 러시아 땅도 아닌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 아이노족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19세기 러시아는 극동지역,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하바 롭스 콥스 우리 두만강 이쪽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이제 일본과, 일본이 우리나라에 동해, 태평양, 북쪽 태평양을 놓고 러시아하고 전쟁하는 그런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러면 러시아가 왜 극동지방, 우리 두만강 위쪽까지 오느냐 이걸 알려고 하면 여러분들이 약간 여러분들의 아이디어를 지중해에 있는, 지중해 위쪽에 있는 흑해에 있는 크림반도로 약간 필름을 돌려야 됩니다. 그러니까 18세기 후반입니다. 당시 러시아에 아주 유명한 여자 황제, 아마 여러분들은 그 여자 황제를 아마 잘 알 겁니다. 예카테리나 2세입니다. 러시아 사람들 이 예카테리나 2세를 러시아의 빅토리아 여왕,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여왕 이렇게 칭송합니다. 이 예카테리나 2세가 흑해에 있는 크림반도를 점령을 합니다. 그 점령한 이유는 러시아의 숙명적인 위치성을 해소하기 위한 것. 즉, 쉽게 말하면 부동항을 찾기 위한 겁니다. 얼지 않는 항구를 찾기 위해서 에카테리나 2세가 크림반도에 있는 유명한 항구도시 세바스 토플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그 흑해에 연안에 항구들은 얼지 않지만 터키 때문에 흑해 아래로 내려오면 이 병목 같은 조그마한 해협이 있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입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막으면 러시아의 함대는 그냥 흑해 안에 있는 그냥 찻잔 속에 있는 함대인 거죠. 지중해를 못 나옵니다. 러시아 함대는 지중해를 통해서 인도양이나 대서양이나 태평양으로 나가고 싶은데 흑해에서 지중해로도 못 나오는 상황이거든요. 그런 데다가 크림전쟁에서 무승부 나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크림전쟁이 끝납니다. 그래서 러시아가 다음으로 모색하고 있는 모색하는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 다음으로 모색하는 그 지역이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통한 인도양으로 진출이었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는 제가 앞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아마 얘기했을 겁니다. 그런데 러시아 하고 영국이 일명 레이스 게임이라고 해서 아프가니스탄을 놓고 두 세력이 대치하고 그러다 보니까 또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찍고 인도양으로 나온다고 하는 그 계기도 또 무산이 됩니다. 그럼 또 어디냐 러시아는 극동 바다, 극동지역, 지금 두만강 하류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물론 이때 러시아인들이 이곳에 올 때 대략 한 1856년쯤 됐습니다. 당시 이 블라디보스토크 이 두만강 하류 지방은 당시 청나라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하고 청나라가 약간의 싸움도 하고 그리고 1860년에 맺어진 베이징조약을 근거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진출합니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에 극동함대를 배치합니다. 이 러시아에 극동함대 배치는 곧 일본으로 하여금 긴장을 하게 합니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극동함대를 만들고 나서 태평양으로 코리안패니실러, 한반도로 내려오려고 합니다. 그 내려오는 과정에는 당연히 일본 하고 충돌하게 됩니다.
러일 영토 교환 협정
그런 와중에 1855년에 일본은 당시 러시아하고 화친조약, 즉, 국교를 맺고 러일 통상 우호 조역을 체결합니다. 이조약에서 홋카이도와 홋카이도 인근에 있는 4개 섬, 이 섬은 일본령으로 하고 지금 여기 지도로 나와있는 대로입니다. 쿠릴열도에 이는 나머지 섬은 러시아로 한다고 하는 그런 협정을 맺습니다. 그래서 사이좋게 쿠릴열도를 나누고 홋카이도 바로 인근 네 개섬은 일본땅이 됩니다. 그리고 무주공산이었던 사할린섬은 러시아 하고 일본이 공동으로 소유하기로 합의합니다. 그러다가 그 해역이 만들어진 20년 후 1875년에 러시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땅 하고 일본땅을 교환하는 영토 교환협정, 일본 말로는 가라후토-치시마 교환 조약이라고 하는데요. 그냥 러시아 사람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이라고 합니다. 이 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1855년에 만들어졌던 조약에서 사할린은 러시아 하고 일본이 공동으로 갖기로 한 거 이것을 없애고 사할린은 러시아 당신들이 다 가져가십시오. 대신에 쿠릴열도 전체 섬은 일본에 주십시오.라고 하는 영토 교환협정이 이루어집니다. 일본 하고 러시아가 러일전쟁이 벌어집니다. 1904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에게 당연히 전리품을 요구합니다. 그 전리품 내용은 뭐였냐면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었던 사할린섬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다 줄 수 없다. 대신에 사할린 섬을 반으로 나누자 그래서 사할린 섬의 북위 50도 미만은 일본에게 주고 이북 50도, 북위 50도 이북의 땅은 이제 러시아가 차지하는 그런 사할린이 남북으로 나눠집니다. 그 협정이 1905년에 체결된 포츠머스조약입니다. 그래서 이 포츠머스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홋카이도 인근에 있는 네 개섬은 말할 것도 없고 쿠릴열도 전역에서 쿠릴열도에 있는 전체 섬 + 사할린의 위도 50도 아래 이 땅이 일본 땅이 됩니다. 실제로 일본은 사할린 섬을 관리하기 위해서 관청도 세우고 그럽니다. 그러고 그쪽 사할린에 당시에 석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석탄을 채굴을 하기 위해서 일본인은 늘 이주도 시키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사할린 섬으로 강제징용을 하게 돼서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 벌어지고 볼셰비키 혁명 이후 적군 하고 백군 간의 내전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내전이 벌어지니까 일본은 잘됐죠. 일본은 내전이 벌여지니까 적군이 아닌 백군을 지원하고요 그 과정에 블라디보스토크, 사할린의 남쪽은 자기들 땅이었습니다. 북 사할린까지 점령을 합니다. 그래서 사할린 전체 블라드보스톡은 일본의 영향권 내로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이제 백군과 적군 간의 내전이 끝나고 1925년에 블라디보스토크 북사할린은 다시 일본이 러시아로 되돌려 줍니다. 그리고 이제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할린 섬의 남쪽, 쿠릴열도 전체, 그 섬은 당연히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이 발발합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시아는 그 세계대전에 늦게 참전하지 않습니까. 당시 미국 하고 영국은 러시아에게 러브콜 합니다. 당신들도 전쟁에 참전해라. 특히 동아시아 쪽 전투에 참여해라. 만약에 이 연합군을 도와주면 지금 현재 일본이 가지고 있는 사할린의 남쪽 섬, 그리고 일본이 지금 차지하고 있는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쿠릴열도 전체의 영유권을 인정하겠다. 그런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러다가 러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날쯤에 1945년 8월에 남사할린하고 쿠릴열도 전역을 점령을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제 2차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일본은 망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사할린섬 전체, 그 다음에 자기들이 차지했던 미국과 영국이 어느 정도 보증을 했던 쿠릴열도 전체를 다 차지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95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그냥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었던 그 땅 사할린 남쪽, 쿠릴열도 전체가 러시아 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일본의 주권이 박탈당하는 겁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홋카이도 인근에 있는 네 개의 섬을 러시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게 된 그런 스토리입니다.